증권 일반
1984년, 은행·상사·건설 ‘빅3’…대한민국 성장 엔진 자화상
- [KOSPI, 한국 경제 지도를 다시 그리다]①
‘정책이 곧 시장’이던 시기…정부 산업 전략이 시가총액 구도 결정
국책기관 중심 투자 구조…미완의 초기 자본시장

[이코노미스트 정동진 기자]1984년 대한민국은 경제 발전의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었다. 1970년대 말 제2차 석유 파동과 1980년의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며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한 한국 경제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했다.
당시 한국 경제는 구조적 위기를 벗어나려는 동력이 응축돼 있던 시점이었다. 과거 고도성장의 그림자였던 ▲물가 불안 ▲산업 간 불균형 ▲외환 부족 등 누적된 문제가 표면 위로 떠오르며 경제 체질 개선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에 따라 정부는 고도성장 일변도에서 ‘안정과 균형’으로 무게중심을 옮긴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1982~1986년)을 추진했다.
은 여전히 유지됐고, 1970년대에 구축된 중화학공업 기반은 주요 수출 산업의 경쟁력을 떠받쳤다. 국내외 불확실성이 남아 있었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경제전망에 따르면 한국의 1983년 실질 국민총생산(GNP)는 9.5% 성장했다. 1984년에는 10.6%라는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며 빠르게 반등했다 과열이 아닌 복원, 팽창이 아닌 질적 전환을 지향한 경제 회복이었다.
이 격동의 시기에 한국 자본시장의 미약하지만 중요한 맥박을 대변하는 지표가 바로 한국종합주가지수(KOSPI)였다. 1980년 1월 4일을 기준(100포인트)으로 정해 1983년부터 소급 산출된 KOSPI는 단순한 주가 지수를 넘어, 당시 한국 경제의 향방과 정부 정책의 의지를 가늠하는 핵심적인 ‘경제의 거울’이자 ‘정책의 바로미터’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자본시장의 관점에서 KOSPI는 정부 주도 경제 성장 전략하에서 제한적이나마 기업 자금 조달의 장(場)이자, 국가 경제 목표가 금융시장에 투영되는 통로였다.
‘은행·종합상사·건설업’이 만든 대한민국 초기 자본시장
1984년 당시 KOSPI 시가총액 상위권은 정부의 개발 전략과 수출 드라이브의 최전선에 있던 은행·종합상사·건설업종이 차지했다. 한국거래소(KRX)의 공식 집계는 1995년부터 시작돼 정확한 순위 확인은 어렵지만, 1983년 말 기준으로 한일은행·한국상업은행·조흥은행·대한석유공사(현 SK이노베이션)·서울신탁은행 등이 상위권을 형성했다.
은행 외에도 종합상사와 건설업체들이 KOSPI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종합상사는 수출 한국의 첨병으로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해외 시장을 개척했고, 건설업체들은 국내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확대와 중동 건설 붐의 수혜를 바탕으로 성장 가도를 달렸다.
이처럼 1984년 KOSPI는 민간 부문의 자율적 혁신보다는 정부의 산업 정책 방향을 그대로 투영하는 거울과 같았다. 정부가 육성하고자 하는 특정 산업과 기업들이 KOSPI 상위권을 형성하며 시장을 주도했다. 특히 ‘빅3’로 불린 은행·종합상사·건설업종은 단순히 시가총액 순위 상위 3개 업종을 의미하기보다는 당시 한국 경제의 성장 동력이자 정부 정책의 핵심 수혜 분야였다. 은행이 자금줄을, 종합상사가 수출길을, 건설업이 국가 기반 시설과 외화벌이를 담당하며 ‘수출 한국’의 성장을 견인하는 모습을 그렸다.
제도는 태동기, 참여는 제한적
다만 1984년 한국 자본시장은 여러 측면에서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성숙하고 통제된 모습을 보였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외국인 투자에 대한 굳게 닫힌 문이었다. 외국인의 국내 상장주식 직접 투자가 본격 허용된 것은 1992년으로, 당시 시장은 국제 자본의 유입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돼 있었다. 당시 외국 자본 조달은 주로 해외 차관에 의존했다. 1982~1986년 도입된 차관 총액은 약 120억달러, 같은 기간 외국인 직접투자는 11억6000만달러에 불과했다.
시장 참여자 구성 또한 미성숙했다. 오늘날과 같은 정교하고 다양한 자산운용 산업은 아직 태동기였다. 투자신탁회사가 일부 기관투자가 역할을 수행했지만, 시장을 주도할 만큼의 규모는 갖추지 못했다. 보험회사들도 기관투자가로서의 역할이 논의되기 시작한 단계였다. 개인투자자 기반도 매우 취약했다. 1980년대 후반 증시가 활황을 보이기 전까지는 대부분 국책은행과 일부 금융기관 등 소수 기관투자가 중심으로 움직였다.
기업 경영의 투명성과 투자자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 역시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1980년대 초반 공시 항목은 20여개에 불과했고, 정형화된 양식 없이 기업 담당자가 임의로 작성해 제출하는 수준이었다. 증권감독원이라는 감독기구가 당시 시장 감독을 맡았지만, 투자자 보호보다는 기업의 재무 건전성이나 산업 육성 같은 거시적 목표가 우선시됐다. 특히 미비한 공시 제도와 제한적인 보호 장치는 시장의 정보 비대칭성을 심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미성숙과 개방의 교차점…본격 서막 오른 자본시장
1984년의 KOSPI는 정부 주도 경제 성장의 압축적인 자화상이었다. 은행·종합상사·건설업이라는 ‘빅3’가 시장을 지배했고, KOSPI는 정부의 산업 전략, 특히 수출 지향적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을 뒷받침하는 자금 조달 창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외국인 직접 투자는 봉쇄됐고, 시장은 소수의 기관과 미미한 개인투자자들로 구성됐으며, 규제와 투자자 보호는 초기단계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러한 통제와 미성숙의 이면에서는 거대한 전환을 향한 씨앗들이 뿌려지고 있었다. 1980년대 초반 경제 안정화 노력과 점진적인 시장 기능 구체화는 이후 1986년부터 본격화된 이른바 ‘3저 호황’(저유가·저금리·저달러)과 맞물려 KOSPI의 유례없는 양적·질적 팽창을 가져오는 기폭제가 됐다. 외국인 투자 제한과 차관 중심의 자금 조달 구조는 점차 자본시장 개방으로 이어졌고, 이는 한국 기업들의 경영 관행과 시장의 투명성 제고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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