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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강해지는 프렌드쇼어링, 한국과 동남아시아 ‘공급망 동맹’ 가능할까 [동남아시아 투자 나침반]

전문가 칼럼

기업은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와 같다. 성장이 멈추면 도태되고, 이윤을 남기지 못하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 생산기지 이전도 마찬가지다. 기업은 언제, 어디에, 어떻게 생산기지를 둘 것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이를 위해 막대한 자본과 시간을 투자한다. 공장을 건설하고 생산이 안정화하는 데까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든다. 따라서 기업의 생산기지 이전은 절대 쉽지 않은 결정이다.이처럼 복잡한 생산기지 이전 전략을 설명할 때 ‘온쇼어링’(Onshoring)은 해외 제조 시설을 본국으로 옮기는 것이고, ‘오프쇼어링’(Offshoring)은 그 반대로 해외로 생산기지를 이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니어쇼어링’(Nearshoring)은 자국과 문화나 언어가 비슷한 인근 국가로 생산 거점을 이전하는 전략이다. 미국 기업들이 캐나다나 멕시코로 공장을 이전한 사례가 대표적이다.프렌드쇼어링…신뢰 국가들과의 협력이 핵심 가치 그렇다면 최근 대세로 떠오른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은 무엇일까? 바이든 행정부 시절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이 자주 언급한 용어다. 우호적인 국가들과 공급망을 재편하여 중국 의존도를 줄이고,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응하자는 전략적 개념이다. 단순히 비용 효율을 따지는 오프쇼어링에서 벗어나, ‘신뢰할 수 있는 국가들과의 협력’이 핵심 가치로 떠오른 것이다.프렌드쇼어링이 부상하자 중국은 '차이나 플러스 원’(China +1) 전략으로 대응했다. 미국 중심의 압박을 피하면서도 공급망을 다변화하려는 전략으로, 중국 외 지역, 특히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생산을 분산시키는 흐름이다. 이에따라 베트남·인도네시아·태국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인도는 가장 큰 수혜국이 되었다. 다국적 기업들의 투자가 몰렸고, 이들 국가는 지난 수년간 고속 성장을 기록했다.하지만, 프렌드쇼어링에도 그림자는 존재한다. 올해 4월 2일, 미국은 베트남·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동남아 주요국에 대해 최대 30%에 달하는 고율 상호 관세 부과를 예고했다. 그 이유는 ▲무역적자 ▲투자 조건 미이행 ▲공공 조달의 불균형 등이다. 프렌드쇼어링 대상국이라 해도, 경제적 요구와 이해관계에선 예외가 없다는 점이 명확히 드러났다. 현재 일부 국가는 미국과 조정을 통해 세율을 낮추는 데 합의했지만, 여전히 공급망 안정성과 시장 접근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데는 한계가 존재한다.이런 상황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과 동남아시아 간의 관계다. 한국은 반도체·전기차· ·디스플레이·이차전지 등 글로벌 핵심 산업의 기술력과 생산 능력을 갖춘 나라다. 그러나 ▲인건비 상승 ▲전력 및 물류 비용 부담 ▲미·중 갈등에 따른 지정학적 리스크 등으로 인해 제조기지의 다변화가 절실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한국 기업들은 동남아를 전략적 거점으로 삼고 있으며, 향후 정부의 동남아 정책 또한 공급망 연계와 경제협력 강화 중심으로 설계될 필요가 있다. 'K-동남아 공급망 동맹'으로 위기를 기회로동남아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단순 OEM 생산기지를 넘어 산업 고도화와 기술 생태계의 업그레이드를 모색하고 있다. 공급망 다변화가 필요한 한국과 산업역량을 끌어올리고자 하는 동남아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구조적 파트너다. 이것이 바로 프렌드쇼어링을 넘어 공급망 동맹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다.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일부 동남아 국가들은 외국인 투자 규제를 강화하고 있으며, 법·세제 변화가 잦고, 토지 소유권 불확실성도 여전히 존재한다. 또한 국가 간 인프라 격차도 크고, 전력·항만·물류 체계의 효율성 역시 균일하지 않다. 생산 인력은 풍부하지만, 고급 기술 인재는 부족하다는 점도 한국 기업 입장에선 부담이다. 이런 요소들이 동남아에 대한 투자를 신중하게 만드는 이유다.이제는 한국 정부가 나설 때다. ▲공동 인프라 개발 ▲제도 연계 강화 ▲인재 교류 확대 ▲디지털 통합 등 구체적인 정책을 통해 한국과 동남아가 단순한 경제 파트너를 넘어, 실질적 공급망 동맹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한국 정부는 동남아 국가들에 대해 존중과 장기적 파트너십 의지를 명확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계획과 실행을 통해 동남아 국가들이 한국을 신뢰할 수 있는 ‘진짜 동반자’로 인식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제 프렌드쇼어링은 단순한 우호국 중심 공급망이 아니라, ‘신뢰 + 역량 + 구조적 상호 보완’이라는 조건을 갖춘 동맹 모델로 진화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위와 같은 정책을 실행할 때 한국기업들이 중심이 되어야 하고 한국기업들이 동남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실질적인 혜택을 받도록 해야 한다. 한국과 동남아시아는 단순한 거래 파트너가 아닌, 서로의 약점을 채워줄 전략적 동반자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기술과 생산 ▲제도와 인력 ▲환경과 데이터 등 이 모든 축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결될 때 한국과 동남아시아는 프렌드쇼어링을 넘어 ‘공급망 동맹’의 대표 모델이 될 수 있다.

2025.08.1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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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공화국, 신뢰를 지우다…감시·처벌 vs 예방·책임 [이근면의 시사라떼]

전문가 칼럼

내각에 관한 인사청문회 1차전이 끝났다. 청문회를 거치지 않는 인사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뉴스가 난무한다. 한 개개인이 살아온 길에 대해서 현미경을 들이대고 오늘의 잣대로 과거를 해부한다. 흠결과 흠집에 대해 과연 누가 ‘죄 없는 자, 이 여자를 돌로 치라’는 말처럼 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공직에 대한 눈높이는 엄격함이 맞다. 국민의 눈엔 정치 엘리트들에 대해서 ‘너는 달라?’ ‘다 같다’가 일반적인 평가다. 이제 한국 사회는 바람직한 사회문화를 갖고 있는지, 예방문화인지 감시문화인지를 따져야 할 때다. 사회적 건강도의 물꼬를 신중히 고민해 볼 때이고 한국 사회는 또다시 전환점에 섰다. 언젠가부터 대한민국은 ‘녹취’가 일상이 된 사회가 되었다. 과거에는 기업이나 공공기관 콜센터에서나 등장하던 “이 통화는 녹음됩니다”라는 문구가 이제는 민간 대화·정치 담화·공무원 조직 안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현실이다.특히 지난 정권 교체 이후 ‘적폐청산’이라는 명분 아래 전 정권의 발언과 지시 사항이 하나하나 녹취, 기록되어 공개되는 일이 이어지면서 공직사회 전반에 ‘책임 회피형 행정 문화’가 자리잡았다. 고위 관료는 말조차 아끼고, 중간 간부는 상사의 지시를 녹음하고, 실무자는 ‘보고서로만 말한다’는 행정 관료사회의 침묵과 방어 문화가 굳어져 버린 것이다.그런가 하면 민간 영역에서도 정치인의 사적 대화·지시 녹음·사무실 대화 등 비공식적 녹취록들이 언론을 통해 폭로되며 사회적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일이 반복된다. 국민들은 사실보다 ‘톤’과 ‘단어’에 휘둘리고, 사회적 판단은 법이 아니라 유튜브 조회수로 이루어진다. 녹취는 진실을 드러내기보다 여론전을 위한 무기로 쓰이고, 개인 간 신뢰는 침묵이나 방어기제로 바뀐다.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사회가 ‘개인정보 보호’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법률과 규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서비스에 실명 인증이 필요하고, 주민등록번호와 전화번호, IP 주소까지 보호의 대상이다. 그렇지만 정작 대화나 인간관계의 가장 핵심인 ‘신뢰’는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사회가 지금의 대한민국이다.신뢰의 붕괴, 사회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다이런 녹취 중심 사회는 단순한 법적 수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본적인 ‘신뢰 자본’(Social Capital)이 붕괴되었음을 상징한다. 신뢰 자본이란 구성원 간 약속과 책임, 협력에 기반한 무형의 자산이다. 이는 조직과 국가 전체의 생산성과 공동체 정신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다.신뢰가 사라지면 모든 것은 계약과 감시, 통제로 바뀐다. 사람은 먼저 의심받고 이후에야 신뢰를 얻는다. 그래서 보고서는 길어지고, 녹취는 많아지고, 의사결정은 느려진다. 이처럼 '말 한마디'가 폭탄이 될 수 있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정치권은 물론이고 학교·기업·병원·공공기관까지 전 영역에서 이러한 ‘책임 회피형 녹취 문화’가 확산되면 결국 신뢰를 전제로 움직이는 조직은 죽는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누가 무슨 말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문제를 어떻게 신뢰하고 해결했느냐’인데 우리 사회는 이 핵심을 놓치고 있다. 감시 사회 경제적·문화적 비용 어마어마해 신뢰가 무너진 사회는 필연적으로 거래 비용(transaction cost)이 늘어난다. 계약을 더 복잡하게 쓰고, 규칙을 촘촘히 만들며, 이를 확인하는 감시인력을 둬야 한다. 이는 단순한 비용을 넘어 사회적 피로감을 유발하고, 결국 기업의 민첩성과 혁신성 그리고 국가 경쟁력까지 저하시킨다.또한 인간관계는 점점 피상적으로 변한다. 진심보다는 기록이 우선시되고, 대화보다는 문자로, 회의보다는 이메일로 ‘남는 말’만 주고받는다. 이처럼 '사람 사이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사회는 삭막해지고, 공동체 의식은 사라진다.이제 우리는 이 흐름을 바꾸어야 할 시점에 있다. 감시가 아닌 신뢰를 기반으로 한 사회문화로의 전환 없이 대한민국은 조직도 경제도 인간관계도 모두 마모된 사회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첫째, 공공기관과 기업부터 녹취 남용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 상담품질이나 업무 보존이 필요한 경우에 한해 최소화된 범위에서만 녹취를 허용하고, 일반적인 대화와 비정형 커뮤니케이션에는 자발성과 책임감 있는 대화를 유도하는 문화로 전환해야 한다.둘째, 신속하고 공정한 분쟁 해결 시스템을 구축해 녹취가 유일한 방어수단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법원 ▲중재기구 ▲소비자보호원 등 제3자 기관이 신뢰할 수 있는 판단과 조정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국민은 사적 폭로와 녹음 대신 제도를 통한 구제를 신뢰하게 된다.셋째, ‘신뢰 회복’에 앞장설 리더십이 필요하다. 고위 공직자·정치인·기업 CEO부터 상대방의 말을 믿고, 약속을 지키며, 불리한 내용이 있어도 해명하고 수습하는 신뢰 기반의 리더십 행동을 실천해야 한다. 이것은 아래가 아니라 위에서부터 가능하다.넷째, 교육과 미디어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의심보다는 신뢰, 책임보다는 양심을 강조하는 인성교육이 필요하다. 언론도 ‘녹취 폭로’에만 집착하지 말고 문제의 구조와 해결을 다루는 보도문화로 나아가야 한다. 다시, 신뢰를 말하자지금 우리는 서로를 너무 잘 감시하고 있지만 너무 쉽게 믿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은 고립되고, 조직은 경직되며, 국가 경쟁력은 정체된다. 결국 신뢰는 비용이 아니라 투자이고 감시는 방패가 아니라 불신의 증거다.이제 녹취와 감시의 문화에서 벗어나 다시 신뢰와 존중의 문화를 회복해야 한다. 말은 기록으로 남기기보다 사람의 기억과 약속 속에 남아야 의미가 있다. 감시가 아닌 신뢰로 사회를 지탱하자. 개인적 가치의 제1덕목은 자유이고 자율이며 벗어나야 할 첫 번째는 감시와 통제이다. 그것이 ▲건강한 공동체 ▲성숙한 민주주의 ▲따뜻한 나라로 가는 길이다.

2025.08.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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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아탈까, 말까...실손보험 가입자의 고민 [스페셜리스트 뷰]

보험

어느 날 아침 일찍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어머니는 매달 8만원을 내던 실손보험료가 갑자기 17만원으로 오른다는 청천벽력 같은 우편물을 받고 매우 난감해했다. 이에 실손보험 전문 손해사정사로 일하는 필자(아들)에게 하소연한 것이다. 실손보험은 전 국민 5명 중 4명이 가입하고 있는 사실상의 국민보험이다. 하지만 이 국민보험의 보험료가 최근 꾸준히 상승세를 타고 있어 가입자들의 고민이 깊어진다. 그렇다면 과거에 실손보험에 가입한 가입자들은 보험료 인상에도 불구하고 보험을 그대로 유지해야 할까, 아니면 갈아타야 할까. 필자는 일단 그대로 유지하라고 답을 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5세대 나온다는데...전환 판단의 기준은실손보험 갈아타기는 최근 가장 ‘핫 한’ 보험 이슈다. 시작은 1~2세대 실손보험의 손해율이 높아지자, 이를 줄이기 위해 금융당국이 강제 전환 방안을 검토하면서였다. 금융위원회 등에 따르면 가입자의 65%는 보험금을 받지 않고 상위 9%가 지급 보험금의 약 80%를 독차지하고 있다. 이에 3~4세대 실손보험은 보장 범위를 축소하면서 보험료를 줄이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 현재 금융당국이 내년 출시를 목표로 준비하고 있는 5세대 실손보험은 비급여 보장한도와 범위를 축소하고 자기부담률을 높이는 구조가 될 전망이다. 대신 보험료는 월 1만원 이하의 수준으로 크게 낮아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1~2세대 가입자가 문제인 셈이다. 실손보험은 약관 개정 시점에 따라 1세대부터 4세대까지 나뉜다. 판매 시기, 담보구성에 따라 2009년 10월 이전 판매한 ‘표준화 이전 실손’이 1세대(구실손), 2009년 10월~2017년 3월까지 팔린 ‘표준화 실손’이 2세대(신실손)다. 2009년 10월부터 2013년 3월까지 판매된 실손보험은 처음으로 자기부담금 10%가 생겼고, 100세 만기, 3년 갱신 상품으로 판매됐다. 2013년 4월부터는 15년 만기, 1년 갱신 상품이 판매됐다. 그리고 2017년 4월~2021년 7월까지 판매된 ‘착한 실손’이 3세대, 2022년 7월 나온 ‘보험료 차등제’ 상품이 4세대다. 세대가 뒤로 갈수록 보험료는 낮지만 자기부담금이 올라가면서 보장은 약해진다.특히 2세대 가입자 중에서도 2013년 3월 이후 가입한 사람은 5년 또는 15년 단위로 재가입 시점에 최신 세대로 전환된다. 반면, 그 이전 가입자는 보험료가 오르더라도 기존 조건을 유지할 수 있다.하지만 정부가 이들에게도 강제 전환을 추진한다는 보도가 나오며 논란이 커졌다. 결국 금융당국은 지난 4월 1일 보도자료를 통해 법 개정을 통한 강제 전환을 폐기하기로 했다.또한 정부는 올해 안에 5세대 실손보험을 출시하는 한편, 기존 1~2세대 가입자에게 보험사가 다시 보험계약을 사들이는 ‘재매입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이후 새로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기존 1~2세대 가입자들을 위해 비급여 특약의 일부만 줄이고, 나머지 보장은 유지하는 중간 전략도 병행 검토 중이다. 따라서 올 연말쯤 5세대 출시와 재매입 인센티브가 확정되면, 기존 1~2세대 가입자는 조건을 보고 갈아탈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처음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필자의 어머니는 실손보험을 최신 세대로 갈아타야 할까. 어머니는 2013년 3월 이전에 실손보험에 가입한 2세대 가입자다. 정부 정책대로라면 올해 말 5세대 실손보험 출시와 함께 기존 1~2세대 실손보험 계약이 재매입될 가능성이 있다. 이에 적어도 올해 말까지는 버티면서 재매입이 실제 되는지 확인하는 것이 좋다. 또 재매입 됐을 때 인센티브 금액을 확인하고 갈아타는 것이 중요하다. 반대로 2013년 4월 이후 실손보험에 가입한 사람이라면 고민의 기준이 비교적 간단하다. 이 가입자들은 앞서 언급했듯 5년 또는 15년 등의 재가입주기를 가지므로 시간이 지나면 실손보험 가입 상품이 5세대로 전환될 수 있다. 이 중 나이가 30~40대로 비교적 젊고 건강해 현재 병원 치료비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 가입자들은 굳이 고액 보험료를 납부하며 가입을 유지할 이유가 적다. 오히려 지금 갈아타는 것이 낫다는 얘기다. 반면 현재 병원 치료가 잦은 가입자는 자신이 낸 보험료 이상의 보험금을 수령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가입자들은 현재 보험을 유지하며 혜택을 최대한 누리는 것을 추천한다. 실손보험금 제대로 받지 못하는 치료들?4000만명이 넘는 가입자를 보유한 실손보험은 제대로 작동되고 있을까. 실손보험은 병원에서 필요한 치료를 받은 후 보험사로부터 치료비를 보전받는 상품이다. 정당하게 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 지의 여부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가입자들이 그동안 고액보험료를 매월 부담해야 함에도 가입을 유지해온 것은 노년이 되면서 점점 치료받을 일들이 많아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실손보험금 청구와 관련해 분쟁이 많은 치료들이 존재한다. 백내장 수술 치료를 받은 후 보험금을 받지 못하는 사례와 함께 최근 유행하는 척추 신경성형술, 무릎 관절을 치료하는 무릎줄기세포치료 주사 등에서도 실손보험금 분쟁이 잦아졌다. 그렇다면 이들 치료는 앞으로 실손보험금을 문제없이 수령할 수 있을까.먼저 백내장 수술 치료의 경우 안타깝지만 대부분 통원보험금만 지급 받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실손보험금은 입원과 통원으로 구분되는데, 입원은 하루 치료비가 얼마가 나오든 전체 한도 금액인 5000만원 내에서 보상된다. 통원은 일당 보험금이 20만~25만원으로 한도가 정해져 있다. 이와 관련해 대법원은 지난 2022년 6월, 백내장 수술 치료 후 입원의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서울 고등법원의 판결을 그대로 인정했다. 대법원이 해당 판결의 심리불속행을 기각 판정한 것이다. 이날 이후 보험사들은 백내장 보험금이 일반적으로는 입원이 필요하지 않다며 통원비만 지급하는 실정이다. 따라서 실손보험 가입자들은 백내장 수술 치료의 경우 실손보험금으로 일 통원보험금만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백내장 수술 치료도 입원의 필요성이 인정되면 입원보험금을 받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금융당국은 ▲수술 전 기저질환이 있는 경우 ▲수술 시점에서 합병증이나 부작용이 발생한 경우 ▲다른 수술을 병행한 경우에 실질적인 입원 필요성이 인정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백내장 수술 치료를 받는 가입자라면 이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의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다양한 신 의료기술 치료법들이 등장하고 있다. 여성질환인 여성 유방의 종양을 제거하기 위한 맘모톰 치료, 자궁근종 치료를 위한 하이푸치료, 남성의 전립선 질환 치료를 위한 전립선결찰술, 자가골수를 채취해서 무릎 관절에 주사해 치료하는 무릎줄기세포 치료 또는 척추 디스크 통증 감소 등을 목적으로 하는 신경성형술 치료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치료법들은 실손보험 약관상 ‘보상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따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다만 백내장 치료와 비슷한 취지에서 입원의 필요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통원보험금만 지급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염두해둬야 한다. 염선무 올받음손해사정 대표손해사정사-토막상식-<손해사정사 선임권제도란?> 실손보험은 보험사와 분쟁이 많을 수밖에 없는 상품이다. 보험약관상 해석에 여지가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손해사정사 선임권제도’를 활용하는 것이 좋다. 보험소비자가 받은 치료에 대해 통원이나 입원 여부를 적절히 판단하는 과정을 손해사정이라고 한다. 보험소비자가 청구한 보험금에 대해서 보험사는 정밀한 손해사정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현장심사 또는 현장조사 등으로 불리는 손해사정을 진행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금융민원이 발생해 도입된 제도가 바로 ‘손해사정사 선임권 제도’다. 보험사에서 위탁한 손해사정사는 보험사편이 될 가능성이 있으니 보험사와 이해관계가 없는 독립손해사정사를 보험소비자가 직접 선임해 중립적인 입장의 판단을 받아보라는 것이 취지다. 무엇보다 이 제도의 가장 큰 장점은 보험소비자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국선변호인을 고용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다만, 이 제도는 실손보험이나 배상책임보험, 주택화재보험과 같은 실제 발생한 비용을 보상하는 보험에만 활용할 수 있다. 수술비나 진단금과 같은 정액보험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과, 보험사로부터 손해사정사 관련 안내를 받은 날로부터 3영업일 내에만 신청할 수 있다는 점을 꼭 알아둬야 한다.

2025.08.1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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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기업→친노동으로…어질한 경제 정책 급변침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법인세 최고세율 25%에서 24%로 인하 ▲주식 양도소득세가 부과되는 대주주 기준 10억원에서 50억원으로 상향 ▲양도소득세 완화 ▲증권거래세 인하 등등…. 이른바 윤석열 정부의 부자감세 정책이자 친기업 정책들입니다. 국내외의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기업들의 조세 부담을 덜어줘 적극적인 경영 활동을 펼칠 수 있게 하겠다는 취지에서 추진됐는데요, 세수가 크게 감소하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윤 정부가 기업 편을 확실히 들면서 경영계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서는 이 같은 정책들이 이전으로 되돌려지고 있습니다. 이 정부는 지난달 말 ‘2025년 세제개편안’을 확정하고 법인세 4개 과표구간의 세율을 모두 1%포인트씩 올리기로 했는데요, 이전 정부에서 1%포인트씩 내리면서 약화한 세입 기반을 다시 강화하겠다는 취지입니다. 주식 양도소득세의 대주주 기준도 다시 10억원으로 환원하고,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도입 조건부로 인하된 증권거래세율을 현재의 0.15%에서 2023년 수준인 0.20%로 인상했습니다. 이재명 정부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과 2차 상법 개정안의 입법화도 강행하고 있습니다. 노란봉투법은 사용자 범위와 노동쟁의 대상 확대, 파업 노동자에 대한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 제한을 골자로 한 친노동법이고, 2차 상법 개정안은 지난 7월 시행된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 등을 담은 1차 개정안에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분리선출 감사위원 확대 등을 추가한 대주주 견제 법안입니다. 경제계와 야당인 국민의힘은 노란봉투법은 파업 만능주의를 조장하고, 상법 추가 개정은 경영권 방어를 어렵게 하는 등 기업 경쟁력을 위축시키는 반기업법이라며 강력히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당은 “추가 논의는 없다”며 이달 중순 임시국회에서 처리한다는 방침을 확고히 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업 중심의 정책이 노동 중심으로 급격히 바뀌는 모습입니다. 정권이 바뀌면 정책도 바뀌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만, 급격한 변화는 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투자 활동에 장애 요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트럼프발 관세전쟁 등으로 국내외 경영 환경이 좋지 않아 가뜩이나 부담이 큰 기업에 정부의 경제 정책 급변은 경영 활동을 더욱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볼멘소리 정도로만 들리지는 않습니다. 이재명 정부는 기업의 우려를 기우로만 치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에게 노란봉투법과 2차 상법 개정안에 대해 “기업들의 부담이 최소화될 수 있도록 업계와 소통하며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하겠다”며 “이를 위해 산업부가 경제계 이슈를 전담 대응할 ‘기업 환경팀’을 신설해 운영하겠다”고 했습니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등 경제6단체장과 만나 “기업을 한국 경제 ‘모든 것의 중심’에 두고 글로벌 1위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전력 지원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이 말들이 빈말로 끝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2025.08.1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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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 개혁, 40년 된 틀을 깨고 민생 만나야 [스페셜리스트 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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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에 도입된 한국의 공공기관 경영 평가 제도는 어느덧 불혹(不惑)의 나이가 됐다. 40년 넘게 지속돼 오면서 평가 지표 체계와 운영 방식에 잦은 개선이 있었지만, 근본적인 틀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 제도는 본래 공공기관에 경영 자율성을 보장하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는 장치를 통해 대국민 서비스를 향상시키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경영 평가가 정부의 공공기관 통제 수단으로 활용되고, 해마다 지표와 과제가 누적돼 평가를 위한 평가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컸다. 이재명 정부는 이러한 오래된 틀을 깨고자 공공기관 개혁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핵심은 경영 평가 제도를 시대에 맞게 전면 개편하고, 기획재정부로 집중된 거버넌스(국정운영 방식)를 재설계하며, 이러한 개혁을 국민의 삶(민생) 개선과 직접 연결하는 것이다.공공기관 개혁은 단순한 행정 효율화 작업이 아니다. 공공기관들은 전기·수도·교통 같은 필수 서비스를 저렴하게 제공하고, 안전망과 소비자 보호 등 다양한 공공 가치를 창출하며, 지역 경제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무려 907조원의 수입·지출과 1096조원의 자산을 굴리는 330여 개 공공기관의 운영 성패는 국민 생활에 직결된다.따라서 개혁의 궁극적 목표는 공공서비스의 품질 제고와 국민 신뢰 회복이다. 이하에서는 ▲40년 된 경영 평가 제도의 문제점과 개편 방향, ▲기획재정부 중심의 관리 구조 개혁 필요성, ▲공공기관 개혁과 민생의 연결 고리를 차례로 살펴본다. 경영평가, 숫자에서 사회적 가치로“현재 공공기관 경영 평가를 간단히 표현하면 줄 세우기이다.”한국의 공공기관 경영 평가 제도는 1983년 시작된 이래 40년간 큰 틀의 변화 없이 지속돼 왔다. 매년 모든 공기업·준정부기관을 일률적인 지표로 줄 세우고 등급을 매겨 성과급을 차등 지급하는 방식은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 수치 중심의 평가로 인해 기관들은 눈앞의 점수 향상에 급급하고, 평가 대비를 위한 인력·비용 부담이 가중되어 본연의 혁신 노력은 뒷전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경영 평가의 목적과 수단이 전도돼, 평가 자체가 목적화되는 비효율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역대 정부마다 국정과제를 성과지표에 추가 반영하면서 평가 내용은 누적됐고, 법령 개정안을 통해 세세한 정책 사항을 평가에 넣으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 결과 평가지표는 비대해지고 현장과 동떨어진 관료적 점검표로 변질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이재명 정부는 이러한 경직된 평가 체계를 정책 효과성과 지속가능성, 사회적 가치 중심으로 전환할 것으로 예상된다. 핵심은 공공기관의 다양한 특성과 본연의 공적 역할을 반영한 맞춤형 성과 평가로의 전환이다. 현재처럼 서로 이질적인 기관들을 단일한 잣대로 평가하기보다는, 기관 유형별 미션에 부합하는 평가 모형을 설계하고 지표를 재구성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공공성과 효율성 간 균형을 도모하고 지속가능성 지표를 신설해 기관의 장기적 발전 기여도를 측정하도록 할 계획으로 판단된다.가령 에너지 공기업이라면 단순 이익률이 아니라 에너지 전환 및 안정적 공급에 얼마나 이바지했는지, 금융 공기업이라면 포용적 금융 확대에 이바지했는지 등을 보는 식이다. 또한 현행 '등급 매기기'식 평가를 탈피해 '컨설팅'형 평가로 바꾸는 방안도 추진된다. 평가 결과를 단순히 서열화하고 벌주기보다,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피드백과 컨설팅에 중점을 둬 실질적 개선을 유도하겠다는 것이다.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평가 전문 기관인 가칭 ‘공공기관 성과관리원’을 신설해 지표 설계, 평가 과정 관리와 평가자 교육까지 전담하게 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궁극적으로 경영평가를 “잘하면 성과급, 못하면 낙제”의 채점 도구가 아니라, 공공기관의 혁신과 역량 향상을 견인하는 제도로 재창조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평가지표 대혁신은 국제적 추세와도 맥을 같이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공공기관의 성과를 재무적 지표뿐 아니라 공공정책 목표 달성도와 사회적 가치 창출 측면에서 평가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실제로 독일·프랑스 등 사회민주주의 전통이 강한 나라들은 사회적 가치 지표를 성과 평가에 적극 반영해 추진력을 발휘하고 있다. 영국에서도 각 부처 산하 공공기관들에 대해 성과 계약(performance agreement)을 맺고 정책 효과를 모니터링하며, 단순한 숫자보다 서비스 품질과 국민 만족도를 중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선진국들은 공공기관 평가에 있어 재무 성과와 함께 공공서비스 효과, 지속가능성, 사회적 책임 등의 요소를 포괄적으로 고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국도 이러한 국제 흐름과 국민 기대에 부응해, 수치 경쟁식 평가를 공공가치 평가로 탈바꿈해야 할 시점이다.물론 개편 과정에서 난관도 예상된다. 수십 년간 굳어진 평가 문화와 이해관계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법령 개정, 평가인력 재교육, 기관들의 인식 전환 등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이를 위해 지금이야말로 평가지표 체계부터 평가 결과 활용까지 전면 개편에 착수할 때이다. 기재부 그림자 걷어내기한국 공공기관 운영 체계의 또 다른 고질적 문제는 기획재정부에 과도하게 집중된 통제 구조다. 현재 공공기관의 지정·해제, 예산·정원 통제, 임원 인사, 경영평가까지 폭넓은 권한이 기재부에 몰려 있다. 이 모든 사항을 심의·의결하는 공공기관운영위원회(공운위) 역시 기재부 장관 소속으로, 사실상 기재부가 안건을 작성하고 주도하는 구조다. 이러한 중앙집권적 거버넌스는 효율성 측면에서 일관된 관리라는 장점도 있으나, 자칫하면 폐쇄적 관료 통제로 흐르기 쉽다.실제로 현행 공운위는 기재부가 구성·운영 전반을 통제하면서, 민간위원들도 친(親)기재부 성향 인사들 위주로 구성돼 거수기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국회 기획재정위원장까지 참석했던 2019년 공운위 토론회에서도 "공운위가 기재부의 거수기에 불과하다"는 지적과 함께 대대적인 개편 요구가 나왔다. 새 정부는 이러한 지적에 공감하며, 공공기관 지배구조의 민주화와 분권화를 추진하고 있다. 우선 공운위의 위상과 소속을 재검토하여, 현행 기재부 산하에서 독립위원회로 격상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공운위를 특정 부처의 영향권에서 떼어냄으로써 정치적 중립성과 전문성을 높이자는 취지다.공운위가 전체 공공기관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만큼, 한 부처의 이해관계와 관성에서 벗어나 정부 전체 관점에서 공공기관 운영 원칙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또한 공운위 구성의 다원화도 중요한 과제다. 기존에는 경제관료와 일부 학계 인사들이 위원 대부분을 차지해 왔으나, 앞으로는 노동계·소비자단체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 대표의 참여를 대폭 확대해야 한다.예컨대 노동조합, 시민단체가 추천하는 인사들을 민간위원으로 포함하고, 의제별로 인권·환경·노동 등의 시민위원회를 구성해 전문적 의견을 수렴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이는 공공기관 운영에 현장 목소리와 사회적 가치를 반영하는 통로를 넓히기 위함이다. 실제로 “공운위가 사회적 가치 관련 시민 목소리를 운영에 반영하는 매개자 역할을 해야 한다”라는 제언이 있고, 새 정부도 방침과도 맞다고 판단된다.무엇보다 기재부의 역할 재정립이 개혁의 핵심이다. 기재부는 국가 재정을 총괄하는 막중한 부처이지만, 그동안 공공기관 인사·예산·평가 등 지나치게 광범위한 관여로 비판을 받아왔다.이는 주무 부처의 자율적 책임경영을 위축시키고, 공기업들이 정책 도구화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앞으로는 기재부가 모든 것을 직접 틀어쥐기보다, 원칙과 기준을 제시하는 역할에 집중하고 세부 운영은 각 부처와 공공기관의 재량에 맡기는 방향으로 구조조정이 필요하다.즉, 수직적 통제에서 수평적 협력 관계로 전환하여 공공기관의 자율과 책임경영을 확립하자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기재부 내부의 반발과 관성도 만만치 않겠으나, 한국형 거버넌스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선 피할 수 없는 변화다.해외 사례는 우리의 나아갈 길을 시사한다. 프랑스는 2004년 재정경제부 산하에 국유자산관리청(APE)을 설립해, 정부의 공기업 소유권 관리를 전문화했다. APE는 해당 공기업들의 임원 임명, 기관장 경영계약, 성과평가, 재무공시 등을 통합 관리하며, 일반 행정조직과 분리된 전문기관으로 운영된다.이는 국가가 주인으로서의 역할(국가주주)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면서도, 개별 부처의 정치적 입김을 차단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한국도 공운위를 장차 이런 독립된 소유권 관리기구로 개편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영국은 공공기관 거버넌스에서 내각사무처(Cabinet Office)와 재무부가 파트너십을 이루는 구조로 유명하다. 내각사무처는 총리를 보좌하며 정부 운영을 총괄하는 정부의 본사 역할을 하는데, 재무부(HM Treasury)와 협력하여 각 부처 산하 공공기관의 성과와 효율을 점검하고 개선을 주도한다.또한 영국은 공직 인사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공직임명위원회(Commissioner for Public Appointments)가 장관 및 공공기관 임원 인사를 독립적으로 감시·규제하는 전통이 있다. 이처럼 권한을 분산하고 전문기구를 통한 투명성을 높이는 장치를 통해, 영국은 공공부문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결국 한국도 공공기관 관리 구조를 한 부처의 집중 통제에서 벗어나 보다 개방적이고 전문적인 거버넌스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기재부는 대주주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일상적 경영은 각 기관 이사회와 주무부처에 맡겨 이중 규제를 완화할 필요가 있다. 최근 국민제안으로까지 “공운위를 독립 행정위원회로 재편”하고 국가소유권 행사의 민주성과 전문성을 강화하자는 목소리가 나온 것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다. 공공기관 운영의 투명한 견제 장치를 마련하면서 동시에 자율성을 높여야만, 공기업들이 스스로 혁신하고 책임지는 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개혁과 민생의 연결고리: 국민이 체감하는 변화공공기관 개혁을 논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국민 삶에 영향 때문이다. 공공기관들은 우리 생활 곳곳에 파고들어 있다. 발전·에너지 공기업의 정책 결정은 전기료와 가스료로, 교통·SOC 공기업의 효율성은 도로·철도 서비스로, 금융·주택 공기업의 성과는 대출금리와 주거안정으로 연결된다.다시 말해, 공공기관의 성패는 국민 개개인의 주머니 사정과 삶의 질에 실질적 파급효과를 미친다. 그렇기에 이재명 정부는 공공기관 개혁을 민생 개혁의 중요한 축으로 내세운다. 경영 평가 개편은 민생과 직결된다. 예를 들어 과거 경영 평가에서는 비용 절감을 위해 인력 감축이나 서비스 축소도 좋은 점수로 인정받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의 효율성 추구는 오히려 국민 불편을 초래하고 장기적으로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유발할 수 있다. 이제는 정책 효과성과 서비스 품질을 평가 중심에 놓음으로써, 공공기관들이 국민 편익을 높이는 방향으로 노력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경영평가에 사회적 가치 지표를 강화하는 것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일자리 창출, 안전사고 예방, 환경 보호, 취약계층 지원 등 공공기관이 수행하는 사회적 책무들이 평가받고 보상받아야만, 기관들도 이에 충실할 유인이 생긴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 시절 경영평가에 사회적 가치 비중을 대폭 확대하자 공공기관들의 관련 사업이 활발해졌던 바 있다. 반대로 최근 사회적 가치 배점을 다시 축소하는 결정이 내려지자 그런 노력들이 후퇴할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새 정부의 개혁안은 사회적 가치와 지속가능성을 핵심 평가축으로 삼아, 평가제도가 국민 눈높이에 부합하도록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거버넌스 구조 개선은 공공서비스의 지역 균형발전과 품질 향상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그간 기재부 중심의 일률적 통제 아래에서 많은 공공기관들이 천편일률적 경영을 강요받았다면, 이제는 각 기관이 현장 상황에 맞게 창의적 해결책을 모색할 자율성이 커질 것이다. 이는 지역 특성에 맞는 공공서비스 제공을 촉진하고, 현장의 목소리가 경영에 반영되는 분권형 혁신을 가능케 한다. 예컨대 지방에 위치한 A공사는 그 지역 주민 필요에 특화된 사업을 개발하려 해도, 중앙부처 지침에 얽매이면 추진이 어려웠다. 그러나 자율성이 확대되면 지역사회와 협력하여 맞춤형 서비스를 펼칠 수 있게 된다. 이는 곧 지역 균형발전과 공공서비스 접근성 제고로 이어진다. 또한 이사회 중심 경영과 외부 견제를 통해 방만 경영을 예방하면, 공기업 부채누적이나 부조리로 인한 국민 부담도 줄어든다. 공공기관 개혁은 국민 세금의 효율적 사용과도 맞닿아 있어, 재정 건전성 확보를 통해 장기적으로 민생경제 안정에 기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 회복이다. 공공기관에 대한 국민 신뢰는 한때 반복된 ‘방만경영’ 논란과 잦은 낙하산 인사 등으로 많이 훼손됐다. 그러나 공공기관이 없으면 안 될 소중한 존재임도 분명하다.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변화, 즉 서비스 개선과 경영 투명성 제고를 이끌어낸다면 공공기관에 대한 인식 전환이 가능하다. 새정부의 개혁이 성과 위주의 숫자 놀음이나 권한 다툼에 그치지 않고, 궁극적으로 “국민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공공기관 만들기”로 귀결되어야 하는 이유다. 실제로 정책 제언자들은 “공공기관 공공성을 강화하는 것이 대한민국 민생을 활성화하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SOC·에너지·복지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공공기관이 직접 서비스 공급을 책임지는 현실에서, 이들의 공공성이 곧 국민 생활안전판이기 때문이다. 개혁을 통해 공공기관이 본연의 책무를 다하고 국민이 그 효과를 피부로 느낄 때, 비로소 공공기관과 국민 간의 신뢰의 선순환이 시작될 것이다. 지속가능한 개혁을 위해이재명 정부의 공공기관 개혁 구상은 낡은 제도를 혁신하여 국민에게 봉사하는 공공기관을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40년 묵은 경영평가 틀을 과감히 바꾸고, 기재부 일변도의 관리구조를 현대적으로 재편하며, 그 모든 변화를 국민 삶의 질 향상과 연결 짓겠다는 방향성은 타당하고 시의적절하다. 물론 개혁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수십 년 간 누적된 관행과 기득권의 저항, 단기 성과를 내기 어려운 구조조정의 특성 등 현실적인 난제가 산적해 있다. 그러나 공공기관의 존재 이유는 국민임을 상기한다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개혁을 지속해야 할 당위는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일관성과 지속성이다.공공기관 개혁은 한 번에 끝나는 이벤트가 아니라, 꾸준한 개선 노력의 프로세스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방향을 흔들지 않고, OECD 등 국제기준과 국민 체감을 모두 고려한 중장기 로드맵을 따라가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개혁 과정에서 노동자와 국민의 참여를 보장하여 현장의 지지를 얻어내는 것도 성공의 열쇠다. “국민이 참여하고, 국민에게 투명한 제도로 개혁되어야 한다.” 시민의 참여와 감시가 뒷받침될 때 개혁 조치들이 현장에서 제대로 안착하고 연착륙할 수 있다. 개혁의 결실로 공공기관들이 국민의 신뢰를 받는 진정한 공복(公僕)으로 거듭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공공기관 개혁이야말로 대한민국 공공부문의 지속가능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험대다. 불혹을 넘은 제도를 과감히 혁신하고, 민생에 실질적 변화를 가져오는 구조개혁을 이뤄낼 때, 국민들은 체감하게 될 것이다. “아, 공기업이 정말 우리를 위해 달라졌구나.” 정부와 공공기관, 그리고 국민이 함께 그 변화를 만들어갈 때다. 필자는 미국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USC)에서 정책학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미국 노스 플로리다대에서 교수 생활을 했고, 현재 명지대 행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국무조정실의 정부업무평가 전문위원, 행정안전부 정부혁신 평가단 등을 역임한 행정·정책 전문가다 현재는 한국국정관리학회 회장 및 한국행정학회, 한국정책학회에 활동 중이다.

2025.08.08 09:00

10분 소요
“연봉 2800억원?”...저커버그가 일으킨 AI 인재 영입 ‘돈의 전쟁’ [한세희 테크&라이프]

산업 일반

지난해 세계에서 가장 큰 연봉을 받은 스포츠 스타는 축구 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알나스르에서 뛰는 그는 2024년 2억6000만 달러를 받았다. 우리 돈 약 3500억원 정도다. 대기업 오너나 최고경영자 외에 천문학적으로 큰 돈을 버는 사람은 주로 글로벌 스포츠 스타나 인기 연예인들이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팬들의 관심과 지지를 끌어들일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과학자와 엔지니어 중에서 이런 슈퍼스타 부럽지 않은 돈을 버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바로 인공지능(AI) 분야다. 수년에 걸쳐 10억 달러(약 1조4000억)를 받는 조건으로 영입 제안을 받은 인공지는(AI) 연구자가 있다는 소문도 나돈다. 슈퍼 인재에 대한 보상 인플레이션을 부채질하는 장본인은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이다. 그는 얼마 전 회사에 초지능연구소(Meta Superintelligence Lab) 조직을 신설하고, ▲오픈AI ▲구글 ▲딥마인드 ▲테슬라 ▲애플 등 경쟁사 초특급 AI 인재들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영입 시도를 하고 있다.2억 달러로 영입한 루오밍팡 수석 엔지니어 메타는 연봉과 계약 보너스, 주식 등을 합쳐 2억 달러(약 2800억원)를 제시해 애플에서 초거대언어모델 개발을 주도한 루오밍 팡 수석 엔지니어를 영입했다. 이어 애플에서 멀티 모달 AI를 연구하던 핵심 연구원도 메타로 옮겼다. 이런 식으로 애플에서 자체 AI 모델을 개발하던 팀에서 4명이 메타로 이동했다. ‘애플 인텔리전스’를 구현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시장 불신이 쌓여가는 애플로선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생성형 AI 시장을 개척한 오픈AI 인력도 예외가 아니다. 현재 10명 이상의 오픈AI 연구진이 메타 초지능연구소로 적을 옮긴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 초지능연구소 40여 명 인원 중 오픈AI 출신이 전체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샘 알트먼 오픈AI CEO가 “메타가 1억 달러(약 1400억원) 규모의 보상을 제시하며 인재를 빼내려 한다”고 공개적으로 불만을 드러낼 정도다. 메타 초지능 연구소는 28살의 알렉산더 왕이 이끈다. 그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를 다니던 중 AI 산업의 미래를 내다보고 AI 학습에 필요한 데이터를 정제해 AI 개발사에 제공하는 스케일AI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이 회사는 10만여 명의 계약 직원을 두고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오픈AI 등 주요 AI 개발사와 협력한다. 일반적 의미의 연구자는 아니지만, AI 업계 정보와 인맥의 허브라는 평을 듣는다. 메타는 왕을 영입하기 위해 지난 6월 스케일AI에 140억 달러(약 19조원)를 투자해 스케일AI의 지분 49%를 취득했다. 스케일AI는 독립된 회사로 운영되고, 왕은 스케일AI 이사 자리도 유지한다. 140억 달러는 왕을 메타 초지능 연구소로 데려오는 값인 셈이다. 이사회가 알트먼 CEO를 몰아내려 했던 ‘오픈AI의 난’ 때 알트먼과 갈등을 겪은 미라 무라티 당시 최고기술관리자(CTO)가 창업한 AI 스타트업 싱킹머머신랩(Thinking Machines Lab) 인력들도 대거 메타 헤드헌터의 목표가 됐다. 보통 4년 간 2억~5억 달러 수준의 보상을 제안받았고, 최고 10억 달러까지 몸값이 책정된 사람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AI 인력이 대략 호날두만큼 번다는 이야기다.초지능 구현 핵심은 슈퍼 인재이는 호날두나 메시가 마케팅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이들 슈퍼 인재가 AI 분야에서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 일은 바로 초지능 개발이다. 메타는 초지능 개발에 진심임을 가장 눈에 잘 띄는 지표, 즉 돈으로 증명하려 하고 있다. 초지능은 인간 지능을 뛰어넘는 수준의 인공지능을 말한다. 오픈AI 설립 목적이기도 한 일반인공지능(AGI)과 비슷하지만, AGI가 사람처럼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범용성에 초점을 맞춘다면, 초지능은 인간을 능가하는 수준의 성취에 방점이 있다. 초지능이 실현된다면 세상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초지능에 가장 먼저 도달한 기업이나 국가는 다른 누구도 갖지 못한 강한 힘을 갖게 된다. 그것이 자산이 될지, 무기가 될지는 장담하기 어렵지만 말이다. 메타나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빅테크로선 AI 학습과 운영에 필요한 그래픽처리장치(GPU)와 데이터센터, 발전 시설 등 인프라 측면에서 경쟁자가 따라오기 힘든 해자를 쌓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혁신적 돌파구를 뚫어낼 인재들이다. 최근 선보인 오픈소스 방식 초거대 언어모델 '라마'(LLaMA) 최신 버전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평가를 받는 등 AI 경쟁에서 밀리는 듯한 메타로서는 구글이나 오픈AI 같은 선도 주자를 따라잡기 위해서 인력을 공격적으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 메타가 일으킨 AI 인재 영입 전쟁을 바라보는 후발 주자들은 마음이 복잡하다. 빅테크들이 GPU를 쓸어가 버려 우리나라는 추경 예산을 편성해 가며 따로 구매해야 했다. 이들에 맞먹는 인프라를 만들기도 어려운 판에, 인력에 대한 처우까지 상상 못할 수준으로 차이가 나면 인재 유출을 피하기 어렵다. 이를 극복할 한 가지 방법은 중국 딥시크가 했듯, 환경의 제약을 뚫고 혁신을 만들어낼 창의적 접근을 가능케 할 환경을 만드는 일일 터다. 또는 연구자를 가슴 뛰게 할 비전을 제시하는 방법도 있다. 자체 AI 개발과 외부 협력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길을 잃은 애플은 핵심 인력을 메타에 빼앗겼지만, 오픈AI 경험을 토대로 AI 기술 개발 방식과 사회적 역할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려 한 싱킹머신랩에선 아무도 이탈하지 않았다. 심지어 저커버그 역시 회사 블로그에 “초지능을 통해 각 개인 역량에 날개를 달고, 스마트 안경 같은 새로운 컴퓨팅 기기로 초지능을 생활화한다”는 글을 올리며 자신들의 작업을 비전으로 포장하고 있다. 우수 인재가 공대를 안 가고 의대만 간다며 꾸짖기 전에, 사람들이 환경의 제약을 뚫고 성취할 수 있도록, 가슴 뛰는 목표를 가질 수 있도록 보상 등 시스템을 개선하고 과학적 상상력을 북돋는 노력이 필요할 듯하다. 이건 인프라와 돈이 있다고 자동으로 이뤄질 일은 아니다.

2025.08.03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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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유대감으로 연결...와인 한 잔에 담긴 의미 [와인인문학]

유통

숫자와 그래프가 난무하고 심각한 토의가 이어졌던 비즈니스 미팅이 끝나고 테이블 위로 어둠처럼 짙은 붉은 액체가 채워진 잔이 놓인다. 호스트는 이 와인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와 라벨의 의미, 와인의 특징을 나지막이 설명한다. 딱딱했던 분위기가 녹아내리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유대감으로 연결된다. 한 잔의 와인에는 도대체 무엇이 담겨 있기에 이토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일까.와인에는 수천 년을 이어온 신화와 역사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황홀한 이야기가 흐른다. 우리가 와인을 마시는 행위는 고대 신을 기리던 제의(祭儀)의 현대적 변주이며, 오늘날의 와인 마케팅은 그 오래된 신화의 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에는 풍요·광기·황홀경의 신 디오니소스가 있다.피와 눈물로 빚은 최초의 브랜드 스토리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인간 여성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났다. 헤라의 질투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제우스의 허벅지에서 다시 태어나 '두 번 태어난 자'라는 의미가 있는 디오니소스는 탄생 서사부터가 이미 비극과 기적을 품고 있다. 박해를 피해 세상을 떠돌던 디오니소스는 가장 아끼던 동료 암펠로스의 죽음을 슬퍼했는데 그의 피가 흐른 자리에서 최초의 포도나무가 자라났다고 전해진다. 사랑하는 이의 피와 눈물로 태어난 열매로 만든 와인은 죽음과 부활, 슬픔과 구원의 서사를 지닌 신의 선물이라는 강력한 '최초의 브랜드 스토리'를 구축했다.와인의 붉은빛은 생명의 피를, 그 취기는 신과의 합일을 통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상징했다. 그의 추종자들이 벌였던 축제 ‘바카날리아’(Bacchanalia)는 사회적 규범과 체면을 벗어던지고 춤과 음악, 와인에 취해 신과 하나가 되는 일종의 종교 의식이었다. 와인은 태생부터 인간의 가장 깊은 심리, 즉 억압된 자아를 해방하고 싶은 욕망을 건드리는 신성한 매개체였다.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와인의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철학자들이 진리를 논하던 ‘심포지움’(Symposium)의 중심에는 항상 와인이 있었다. ‘함께’(Sym)와 ‘마신다'(posium)의 합성어인 심포지움은 원래 ‘밤새도록 마시는 와인 파티’였던 것이다. 연회의 주최자인 ‘심포시아르크’(Symposiarch)가 와인과 물의 희석 비율을 결정했는데 그는 그날의 분위기와 대화의 주제에 맞춰 취기의 강도를 조절하며 모임 전체를 지휘했다. 원액 그대로를 마시는 것은 ‘야만인’의 행위로 치부됐기에, 와인을 마시는 행위 자체가 문명인의 세련된 교양과 절제를 증명하는 사회적 장치였던 셈이다.로마의 거대한 와인 소비량은 로마 시내에 있는 ‘몬테 테스타치오’ 언덕이 증명한다. 이 언덕은 깨진 와인 항아리 ‘암포라’ 조각 수천만 개가 쌓여 만들어진 인공 언덕이다. 제국 전역에서 로마로 흘러 들어온 와인의 양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다. 암포라 손잡이에는 생산지와 연도, 등급을 증명하는 인장이 찍혔다. 이는 품질과 브랜드를 식별하는 ‘레이블’ 역할을 했다. 이렇듯 고대 사회에서 와인은 종교적 성물이자 사교의 촉매제였다. 경제를 움직이는 화폐이기도 했다. 현대 와인 마케팅, 디오니소스의 후예가 되다시간이 흘러 신들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디오니소스가 와인에 불어넣은 신화적 유산은 현대 마케팅 전략 속에 고스란히 살아 숨 쉬고 있다. 현대의 와인 마케터들은 영리하게도 고대의 성공 방정식을 그대로 재현한다.첫째 ‘브랜드 스토리텔링의 강화’다. 칠레 와인 ‘1865’가 골프 애호가들 사이에서 ‘18홀을 65타에 친다’는 행운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것이나 호주의 ‘19 크라임스’(19 Crimes)가 범죄자들의 이미지를 증강현실(AR) 레이블에 담아 와인에 반항적인 서사를 입힌 것이 대표적이다. 이는 디오니소스 신화가 와인에 극적인 탄생과 구원의 스토리를 부여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소비자는 와인에 담긴 ‘이야기’를 구매하고 싶어 한다.둘째 ‘럭셔리 이미지와 신비주의의 구축’이다. VIP 고객을 대상으로 와인 시음회를 열고 귀한 와인을 선보이는 전략은 고대 심포지움의 현대적 재현이다. 와이너리들은 한정된 생산량, 어려운 접근성 그리고 제임스 서클링과 같은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가 부여한 높은 점수를 통해 신비주의를 구축한다. 보르도의 ‘앙 프리뫼르’(En Primeur)처럼 병에 담기기도 전에 선물(先物)로 거래되는 와인 시장은 이런 신비주의의 절정이다.셋째 ‘떼루아(Terroir)라는 이름의 현대적 신화 창조’다. 토양 및 기후 등 포도밭의 자연환경을 의미하는 떼루아는 이제 과학적 용어를 넘어 마케팅의 핵심 신화가 됐다. 특정 지역의 흙과 햇빛이 포도에 특별한 영혼을 불어넣는다는 믿음은 고대인들이 특정 영토를 신성시하며 그곳에서 난 산물을 특별하게 여겼던 것과 같다. ‘나파 밸리’나 ‘몽라쉐’라는 지명 자체가 하나의 강력한 브랜드가 되는 현상은 떼루아가 와인의 품질을 넘어 소비자의 심리적 만족감을 채우는 신화로 기능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소비자가 고가의 와인에 기꺼이 지갑을 여는 이유는 무엇일까. 와인은 구매해서 마셔 보기 전에는 맛과 풍미를 알 수 없는 대표적인 ‘경험재’다. 따라서 소비자는 레이블의 디자인·브랜드 스토리·원산지의 명성·가격표와 같은 외부적 단서인 ‘사회적 신호’에 크게 의존한다.특별한 와인을 오픈하는 행위는 단순한 음주가 아니라 나의 안목과 사회적 지위를 증명하고 일상에서 벗어나는 작은 의식이 된다. 브랜드 스토리에 감화되고 떼루아의 신화를 음미하며 한 모금의 와인에서 역사를 느끼는 것. 이는 과거 디오니소스 추종자들이 광란의 축제를 통해 황홀경에 빠져들었던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와인의 가격표는 그 황홀경을 경험하는 데 필요한 입장료인 셈이다.오늘날 비즈니스 테이블에 오른 한 병의 와인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그것은 고대의 신화를 품고 현대의 기술로 빚어낸 욕망의 결정체다. 와인 마케터들은 디오니소스의 후예들처럼 오늘도 우리에게 취기를 넘어선 황홀한 ‘경험’을 팔고 있다. 우리가 마실 다음 와인잔에는 과연 어떤 신화가 담겨 있을지 한 번쯤 음미해 볼 일이다.

2025.08.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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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빵왕과 대통령, 그리고 혁신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SPC그룹은 국내 최고이자 최대 제빵 전문기업입니다. 1945년 창업자 故 허창성 명예회장이 황해도 웅진에 문을 연 ‘상미당’(賞美堂)이라는 작은 빵집에서 시작해 1959년 서울 용산에 ‘삼립제과공사’를 설립하면서 기업 형태를 갖췄습니다. 지금은 ▲삼립식품 ▲파리바게뜨 ▲배스킨라빈스 ▲던킨도너츠 등 다수의 브랜드를 갖추고 전국 6500여개 매장에서 하루 770만여개의 빵을 생산하고 있는데요, 이 정도 규모의 제빵 회사는 국내에서 SPC그룹이 유일합니다. SPC그룹은 지난 2004년 중국 진출을 시작으로 현재 11개국에서 650여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기도 한데요, K-베이커리 인기를 타고 글로벌 영토를 꾸준히 확대해 가고 있습니다. SPC그룹이 국내를 넘어 글로벌 ‘제빵왕’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이 자랑스럽기까지 합니다만, 내부에서는 노동자의 산재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어 ‘K-제빵왕’의 자부심을 무색하게 합니다. 실제로 2022~2025년 사이 SPC 계열 공장에서의 산재 사망자는 기계 끼임 등의 사고사 3명, 과로로 인한 질병 사망자 3명 등 총 6명이나 됩니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산재 사고가 있었는데요, 최근 5년간 발생한 산재 신청 건수가 약 1000건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SPC그룹은 대형 산재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소비자들의 공분을 샀고 경찰과 고용노동부의 조사 및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고 방지 대책도 내놓았지만 산재 사고가 사라지지 않고 관행적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생산 현장의 구조적 위험성 ▲장시간 노동 ▲안전관리 미흡 ▲야근 및 교대근무 환경 등 빵 생산 시스템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내부 관계자들은 입을 모읍니다. 한 관계자는 “빵 생산 공정 전체가 자동화돼 있지 않아 중간중간 사람이 직접 해야 하는 일도 있는데, 여기서 사고가 나고 있다”고 했습니다. 문제점과 해법은 다 알고 있지만 실제로 이뤄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SPC그룹이 생산직 야근을 8시간 이내로 제한하기로 전격 결정하고 오는 10월 1일부터 전면 시행하기로 했습니다. 회사 측은 “8시간 초과 야근 폐지를 위해 인력 확충, 생산 품목과 생산량 조정, 라인 재편 등 전반적인 생산 구조를 완전히 바꿀 것”이라고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반가운 소식인 것은 분명합니다만, 이재명 대통령이 경기 시흥 SPC삼립 시화 공장을 방문해 가혹한 업무환경 문제를 질타하자마자 이 같은 결정을 했다는 것이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서나 볼뻔한 모습이 연출된 것인데요, SPC그룹이 산재 사고를 꼭 해결하겠다고 생각했다면 대통령이 얘기하기 전에 얼마든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착한 제빵왕’으로 소비자들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을 겁니다.지금처럼 국내외가 복합 위기에 직면해 있을 때 기업이 생존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혁신이 필요하다고들 합니다. 그 혁신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내부에 직면한 문제를 구성원과 함께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해결한다면 그것이 바로 혁신입니다.

2025.08.0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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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표상 때문에 괴로워요"...아이돌 팬들의 고충 [백세희의 컬처&로(LAW)]

전문가 칼럼

지난 7월 5일, 고양시에서 개최된 블랙핑크의 콘서트에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필자는 공연장 일대에서 콘텐츠진흥원과 한국대중음악공연산업협회가 주관하는 암표 근절 캠페인에 참여했다. 법률상담을 진행하며, 우리 공연문화를 좀먹는 암표의 심각성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상담소를 찾은 관객들은 저마다 티켓팅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암표상이 취하는 폭리에 대해 억울함과 분노를 토해냈다.자유시장경제? 그래도 암표가 나쁜 이유해외 유명 가수의 내한공연이나 국내 아이돌 그룹의 공연이 ‘1분 컷’으로 매진되고, 암표가 대거 발각되었다는 뉴스는 새로울 것도 없을 정도로 비일비재하다. 공연기획사와 티켓판매처는 부정거래 예매를 취소 처리하고 이들에게 다른 공연에서의 예매도 금지하는 패널티를 주겠다고 선언했지만, 이런 경고가 무색할 정도로 암표는 횡행하고 있다.암표상이 티켓을 대량으로 사들인 뒤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되파는 일은 공연계의 골칫거리다. 이에 대응하여 공연기획사 측에서는 예매한 아이디와 실제 입장하는 자가 동일인일 것을 입증해야만 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이에 질세라 암표상들은 ‘아옮(아이디 옮기기)’, ‘계옮(계정 옮기기)’ 등 방법을 이용해 자신의 티켓을 구매자의 아이디로 옮겨 주며 공연기획사 측의 대응을 무력화한다. 암표 수법도 꾸준히 발전하는 셈이다.그런데 이쯤에서 암표는 왜 나쁜 것인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암표에 붙는 프리미엄, 즉 추가적인 금액을 ‘선착순 경쟁을 하지 않고 입장권을 확보하는 부가가치’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암표를 ‘위험을 덜기 위한 대가’로 접근한다면, 왜 나쁜 것인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암표의 문제는 공연의 생산자가 아닌 제3자, 즉 암표상의 배만 불린다는 데 있다. 암표상은 공연의 생산자도 향유자도 아니면서 가운데 껴서 이득만 챙길 뿐, 공연예술 생태계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 나아가 이중매매나 공연 취소시의 환불문제 등에 대해 정당하게 책임을 지지도 않는다. 또한 값비싼 프리미엄으로 인해 ‘경제는 어려운데 공연계만 호황’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다.공연법서는 ‘기업형 매크로’ 암표상만 처벌암표는 오래전부터 처벌의 대상이었다. 처벌의 근거인 「경범죄처벌법」 제3조 제2항은 나루터, 정류장 등에서 입장권 등을 다른 사람에게 웃돈을 받고 되파는 행위를 20만원 이하의 벌금 등으로 규율하고 있다. 이 조항은 1973년, 그러니까 52년 전에 신설되었다. ‘나루터’ 같은 오래된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오프라인상의 행위만을 규율한. 따라서 온라인상 이루어지는 암표 판매를 처벌할 수 없다. 처벌 수위도 매우 낮다.이런 문제점을 반영해 2020년 12월 「공연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당시의 개정법은 ‘정부의 암표방지 노력 의무’만을 규정할 뿐이어서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다 2023년 2월 「공연법」의 재개정을 통해 매크로를 이용한 암표상을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드디어 마련되었고, 2024년 3월 22일부터 시행되었다. 하지만 최근의 개정에도 한계는 존재한다. 개정법은 매크로를 이용하는 암표 판매를 금지하고 있으므로, 매크로 없이 티켓을 잡아 폭리를 취해도 만일 그것이 온라인에서 이루어진다면 제재 근거가 없다는 문제가 남는다. 「공연법」 규정만으로 암표 판매를 중개하는 ‘플랫폼’까지 함께 처벌하는 것은 어려워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많다. 법정형 역시 범죄억지력을 갖기에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다.기업형 암표상은 형법상 업무방해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약칭 정보통신망법) 위반으로 처벌받는다. 법원은 자금관리책, 예매책, 매크로 프로그래머, 예매사이트 계정모집책, 티켓 수령책, 판매책, 전달책으로 구성된 온라인 암표 조직에 대해 업무방해와 정보통신망법 위반의 유죄를 선고하고 있다(대구지방법원 서부지원 2021. 1. 22. 선고 2020고단178 판결 외 다수). 정당한 접근 권한 없이 예매사이트에 침입해, 수집한 ID의 명의자인 것처럼 접속한 후 티켓을 구입하여 위 예매사이트의 업무를 방해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현재까지 개정된 「공연법」을 적용한 처벌례는 없다. 지난 10월 「공연법」을 적용할 수 있는 매크로 암표상을 처음으로 적발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뿐, 이에 대한 판결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이들에게는 「공연법」 위반은 물론, 과거와 마찬가지로 형법상 업무방해와 「정보통신망법」 위반도 선고될 가능성이 높다. 별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기 때문은 물론이고, 범죄 수익을 몰수할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몰수·추징 역시 징역이나 벌금과 마찬가지로 형벌의 한 종류이기 때문에 죄형법정주의 원칙상 반드시 법률에 근거해 선고되어야 한다. 「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약칭 범죄수익은닉처벌법)은 장기 3년 이상의 형을 선고하는 죄에 대하여 범죄로 인하여 얻은 이익을 몰수·추징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업무방해와 「정보통신망법」 위반(정보통신망침해 등)은 모두 5년 이하의 징역을 법정형으로 정하므로 「범죄수익은닉처벌법」에 의한 범죄수익의 몰수·추징이 가능하다.하지만 「공연법」만에 의해서는 범죄 수익을 환수할 수 없다. 「공연법」 내에 별도의 몰수·추징에 관한 조항을 두지 않은 데다가, 최대 1년 이하의 징역을 부과할 수 있을 뿐이므로 「공연법」 위반만으로는 장기 3년 이상의 형을 부과하는 죄에 적용되는 「범죄수익은닉처벌법」 상의 몰수·추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별도로 법정형이 무거운 업무방해 등의 유죄가 인정되어야 한다. 단지 개정된 「공연법」만으로는 암표상들에 대한 범죄억지력이 충분하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암표 거래 빙자 사기 피해도 잇달아암표 자체가 갖는 해악을 넘어서, 암표 판매를 빙자한 사기 범죄까지 활개다. 돈만 받고 잠적하거나 유효하지 않은 티켓을 전달하는 수법이 일반적이다. 필자가 공연장 상담소에서 만난 관객들은 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물어왔다.암표상들은 통상 정가에 수 배 정도에 해당하는 금액을 제시한다. 처음부터 수십, 또는 수백 배의 금액을 요구하지 않음으로서 진정한 판매자로 보이려는 의도이다. 그러나 이후 잠적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환불을 요구하는 피해자에게는 “계좌 명의인이 자신의 지인이고 판매하는 티켓이 여러 장이므로, 지인에게 반환을 요청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확인을 위하여 피해자가 입금자명을 정정하여 다시 동일 금액을 입금하여야 한다”는 식으로 2차, 3차 송금을 유도한다. 무엇보다 공식 판매처가 아닌 곳에서 사지 않는 것이 제1원칙이지만, 만약 이미 입금을 한 경우 추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2차, 3차 송금은 하지 않고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사기를 당했으면서도 피해 금액이 비교적 소액이고, 나아가 자신 역시 함께 처벌을 받거나 불이익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는 이도 있었다. 암표의 구매자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 사기의 피해자일 뿐이므로 적극적으로 수사기관에 신고할 필요가 있다. 경찰서에 방문하거나 사이버범죄신고시스템에 접속하여 사기죄로 신고할 수 있다. 입금한 계좌번호, 예금주명을 알리고, 미리 갈무리해 놓은 입금내역 증거를 첨부한다. 나아가 암표상의 계좌가 국내 계좌일 경우 해당 은행 고객센터에 ‘사기 피해 계좌’임을 명시해 지급정지를 요청한다. 이때 수사기관에 접수한 사건 번호 등을 요구할 수 있으므로 미리 신고를 해 접수 번호를 파악해 놓는 것이 좋다. 이외에 금융감독원 전자금융사기피해금 지급정지제도(1332)를 이용할 수도 있다.암표 사기는 결국 처벌을 받는다는 인식이 퍼지려면, 공연 소비자들이 적극적으로 암표의 해악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신고해야 한다. 필자 역시 앞으로의 몇몇 대규모 공연에서 콘텐츠진흥원 등과 함께 암표 근절 캠페인에 나설 예정이다. 본 칼럼의 독자들이 공연장에서 법률상담소 푯말 앞에 앉아있는 필자를 보고 말을 걸어주길 기대한다.백세희 법률사무소 아트앤 대표변호사

2025.07.30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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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페인 커피는 어떻게 진화해왔나 [심재범의 커피이야기]

전문가 칼럼

한 여름, 시원한 아이스커피 한 잔이 간절한 계절이다. 하지만 무심코 여러 잔을 마시다 보면, 카페인 과다 섭취로 불면증이나 심장이 두근거리는 부작용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판매하는 커피 한 잔에는 150mg 정도의 카페인이 함유돼 있으며, 이는 하루 권장 섭취량의 약 3분의 1에 해당할 정도로 적지 않은 양이다. 최근에는 카페인 과잉 섭취에 대한 우려와 함께, 건강 중시 트렌드가 맞물리며, ‘디카페인(decaffeination) 커피’가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시는 디카페인 커피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얼마나 신뢰할 만한 수준일까. 디카페인 커피의 특징과 시대별 변화 및 최신 트렌드를 간단히 살펴봤다. 카페인 제거 기술은 진화 중화학적 용매(염화메틸렌)를 사용하는 방식은 가장 오래된(1세대) 디카페인 처리 방식이다. 이 방식은 수증기로 생두의 세포벽을 연 후 염화메틸렌에 담가 카페인을 선택적으로 제거하고 다시 고온의 증기로 용매를 증발시킨다. 화학적 용매 방식은 스타벅스를 포함한 프랜차이즈 커피 브랜드의 초기 디카페인 제품 혹은 인스턴트 커피에 주로 사용돼 왔다. 대량생산을 포함한 생산효율성이 높은 것이 강점이다. 다만 화학적 용매 방식의 디카페인 제거 비율은 97%(미국 식품의약국(FDA) 디카페인 표기 기준) 내외다. 엄밀히 말하면 ‘저 카페인’에 가깝다. 카페인이 완전히 제거됐다고 보기 어려운 셈이다. 또한 화학적 용매 방식은 커피의 고유한 향미를 손상시킬 수 있고, 화학 용매 성분의 잔류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있다. 이런 이유로 화학적 용매 방식은 최근 들어 사용 빈도가 줄고 있다. 화학적 용매 방식의 안전성 논쟁 이후 2세대인 ‘스위스 워터 프로세스’ 방식과 같은 안전한 방식이 대두 됐다. 스위스 워터 프로세싱은 생두를 따뜻한 물에 담가 향미 성분과 카페인을 함께 녹여낸 후 활성탄 필터에 통과시켜 카페인만 제거하는 방식이다. 이후 남은 ‘향미 성분이 가득한 물’(Green Coffee Extract·GCE)에 새로운 생두를 담가 카페인만 제거하고 커피 고유 성분을 보존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방식은 스위스 기술을 기반으로 개발됐다. 캐나다 밴쿠버 인근의 위치한 디카페인 커피 제조사 ‘스위스 워터’(Swiss Water Decaffeinated Coffee Company Inc)가 상용화하며 시장에 안착시켰다.스위스 워터 프로세싱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커피 브랜드는 ‘블루보틀 커피’이며, 카페인 제거 비율은 99% 이상이다. 스위스 워터 프로세스는 안전한 물을 이용해 신뢰도가 높다는 장점이 있지만, 섬세한 커피 향미 발현이 아쉽다는 의견도 있다. 스위스 워터 프로세싱의 디카페인 방식 이후, 콜롬비아에서 유행한 2.5세대 ‘사탕수수 디카페인’(Sugarcane EA Process)방식이 새롭게 각광 받고 있다. 사탕수수를 발효해 얻은 천연 에틸아세테이트(EA)를 사용해 카페인을 제거하는 방식은 ‘자연 유래’ 물질을 사용함으로서 소비자들에게 안정감을 주고, 화학적 불안감 없이 상대적으로 양호한 품질의 자연 성분 디카페인 커피를 생산할 수 있다.콜롬비아는 커피 생산지와 디카페인 처리 공장이 물리적으로 가까워, 신선도에서도 유리한 환경이다. 사탕수수 방식의 카페인 제거 비율은 99% 이상이며, 항미 성분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콜롬비아의 사탕수수 방식은 한국의 커피업체 ‘몽타주 커피’의 디카페인 커피에 사용되고 ▲프릳츠 ▲커피리브레와 같은 전문 스페셜티커피 업체도 사용하고 있다. ″카페인 제거 방식에 따라 품질 달라져“디카페인 프로세싱의 3세대 처리 방식은 2023년부터 화제가 되고 있는 ‘마운튼 워터 프로세스’(Mountain Water Process)다. 멕시코에 위치한 ‘Descamex’라는 전문 기업이 독점적으로 운영하는 이 공정은 스위스 워터와 유사한 방식이지만, 멕시코 고산지의 빙하수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기술적으로는 위에서 언급했던 GCE 방식을 활용해 카페인을 제거하되, 멕시코 테루아에 기반한 ‘스토리 텔링’이 강조된다. 한국에서는 ▲커피리브레 ▲모모스커피 ▲나무사이로와 같은 스페셜티커피 업체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다. 마운튼 워터 방식의 카페인 제거 비율은 99% 이상이며, 보통 단맛이 나는 커피에서 훌륭한 맛의 조화를 보이고 있다. 마운튼 워터 프로세스는 사탕수수 방식과 더불어 스페셜티커피 업체들이 가장 선호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지난해 마켓리서치 자료에 따르면, 전세계 디카페인 커피 시장은 20억 달러 규모로 추산되고 있으며, 코로나19 사태 이후 두 배 가까이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디카페인 커피는 프랜차이즈 커피와 같은 전통 커피 산업 기준으로 봤을 때 시장 규모가 2% 내외에 불과하다. 하지만 스페셜티커피 산업의 내부 자료를 보면 시장 규모는 10%까지 빠르게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디카페인 커피는 단순히 ‘카페인을 제거한 커피’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카페인을 제거했는가’에 따라 품질과 가치가 갈리는 시기에 접어 들었다. 1세대는 효율성과 대량 생산, 2세대는 안전성과 신뢰, 2.5세대는 자연 유래와 지역성, 3세대는 테루아와 지속 가능성이라는 가치로 진화해왔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디카페인 커피 산업은 앞으로도 더욱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보이며, 환경과 품질을 함께 보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커피 애호가들과 소비자들에게 선택 받게 되리라 판단한다.심재범 커피칼럼니스트

2025.07.30 13:57

4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