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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은 왜 명품이라 불리는가 [이윤정의 언베일]

전문가 칼럼

“럭셔리 브랜드의 인기와 명성이 예전만 못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늘었다. 럭셔리 브랜드와 일반적인 브랜드의 차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의견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고액 자산가를 제외하고는 경기 침체 등으로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중시하는 소비 패턴이 강해지고, 정보를 다량 보유한 소비자의 안목이 높아진 점도 한 몫을 한다. 흔히 럭셔리 브랜드를 ‘명품’(名品)이라고 부르지만, 모든 럭셔리 브랜드가 명품의 자질을 갖춘 것은 아니다. 해외에서 수입된 고가의 제품을 통칭하는 용어가 필요하다면 럭셔리 브랜드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럭셔리 브랜드’와 ‘명품’의 차이 대다수 럭셔리 브랜드는 가격이 높은 편이다. 이유는 다양하다. 기본적으로 ▲탁월한 ‘품질’ ▲짧게는 50년, 길게는 100년 이상 지속된 ‘디자인’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장인 정신’ ▲역사와 유산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 등을 포함해 브랜드의 신뢰도와 이미지를 쌓아왔기 때문이다. 높은 가격은 긴 세월 동안 쌓아온 브랜드의 명성에 품질이 더해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럭셔리 제품 중에서도 명품의 자격은 무엇일까.앞서 언급한 조건에 ‘희소성’을 추가하고 싶다. 럭셔리 브랜드의 제품 중에는 처음부터 아예 하나 밖에 만들지 않는 제품도 있다. 요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하이 주얼리’가 대표적이다. 하이 주얼리는 원석이 주인공인 만큼 태생부터 여러 버전을 만들기 어렵다. 진귀한 원석을 찾으면 그에 맞춰 디자인을 하기 때문에 매년 나오는 하이 주얼리 컬렉션의 모든 제품은 한 점씩만 제작된다. 샤넬이나 디올 등 패션 브랜드에서 간헐적으로 선보이는 ‘오트 쿠튀르’(최상급의 맞춤 의상)도 마찬가지다. 제작 과정이 거의 사람의 손으로 이뤄지며, 한 디자인에 한 벌 정도만 만든다. 각 브랜드가 소개하는 ‘리미티드 에디션’은 희귀함을 추구하는 럭셔리 브랜드의 정체성이 잘 나타난 결과다. 유명세를 얻어 잘 팔리던 제품이 어느 순간 희소성을 잃게 돼 인기가 떨어지는 점도 럭셔리 브랜드의 속성을 잘 나타낸다. 시계 이상의 예술품 '라 꿰뜨 뒤 떵'또 하나의 요소를 추가한다면 ‘예술성’을 꼽고 싶다. 예술성은 특정 기준으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예술 작품처럼 만들어진 상품을 만나면 명품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일상에서도 사용 가능하지만, 브랜드가 보유한 창작성을 마음껏 표현하는 데 방점을 찍은 제품이다.최근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바쉐론 콘스탄틴(Vacheron Constatin)과 루브르 박물관의 파트너십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시가 개최됐다. 지난 12일까지 열린 ‘기계의 예술’(Mecaniques d’Art)이다. 이 전시에 소개된 ‘라 꿰뜨 뒤 떵’(La Quete du Temps·시간의 탐구)은 감히 예술품이라 부를 만하다. 수백 년을 이어온 스위스 시계 제작 노하우와 공예 기법이 조화를 이룬 시계에 사람의 움직임을 정교하게 구현한 기계 장치인 ‘오토마통’(automaton)을 결합했다. 시계는 ▲상단의 돔 안에 자리한 오토마통 ▲중간의 시계 부분 ▲하단의 음악 장치 등으로 구성됐다. 무려 7년 간의 개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시계는 6293개의 기계식 부품(시계를 위한 2370개 포함)과 외관을 위한 1020개의 부품 등이 결합한 작품이다. ▲오토마통이 구현하는 144개의 움직임 ▲오토마통에 내장된 158개의 캠 ▲8개의 오토마통 관련 특허 출원 등 마치 ‘신기록 제조기’ 같은 스펙도 갖췄다. 압도적인 규모와 존재감을 자랑하는 ‘라 꿰뜨 뒤 떵’은 높이 1m가 넘는 작품으로 시계를 넘어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경이로운 창작물에 가깝다. ‘손의 힘’ 가치 전한 보테가 베네타전(展)럭셔리 브랜드에서 ‘사람의 손 맛’은 필수적이다. 올해 여름 서울에서 전시를 연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의 ‘세계를 엮다: 인트레치아토의 언어’ 전시는 다시 한 번 손의 힘을 느끼게 해줬다. 보테가 베네타의 인트레치아토 탄생 50주년을 기념한 전시에서는 ‘엮임’이라는 주제로 한국 작가와의 협업 작품을 선보였다. ‘브릭 아 브락’(Bric a Brac) 시리즈 중 다섯 가지 디자인의 창작품도 전시했다. 브릭 아 브락은 이탈리아 북동부 베네토 지역의 보테가 베네타 아틀리에에서 사용하고 남은 가죽 조각을 엮어 완성한 특별한 창작물이다. 각 크리에이션은 브랜드의 시그니처인 ‘인트레치아토’(얇은 스트랩 모양의 가죽을 패널이나 나무 몰드를 따라 손으로 정교하게 엮어 완성하는 기법)로 완성됐다. 다양한 형태와 움직임을 보여주며 진화된 수공예의 표현력을 증명한다. 마치 뜨개질을 하듯 가죽을 자유자재로 엮어 표현한 5개의 작품은 단순한 핸드백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장인이 수십 시간, 혹은 수백 시간을 들여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손으로 제작한 하이엔드 시계와 하이 주얼리도 명품이라 부를 수 있다. 제품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정성과 시간은 대중적인 브랜드에서는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명품은 ▲고유의 디자인 ▲품질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변화 등을 장착한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나열한 몇 가지 요소를 갖춘 제품이나 브랜드를 만났을 때 럭셔리 브랜드는 과시의 대상이 아닌 잘 만들어진 아름다운 작품을 소유하는 기쁨을 제공한다.

2025.11.15 09:30

4분 소요
'너도나도 출렁다리' 만들기…행정은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나 [스페셜리스트 뷰]

전문가 칼럼

많은 시민들은 정부·지방자치단체·공공기관(이하 국가)이 사회 전체의 부를 지키고 늘려주며, 나의 안전과 이익을 지켜주리라는 막연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국가가 이러한 믿음에 반하는 정책을 종종 취해왔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공공 목적의 사업을 한다며 시민의 사유재산인 토지를 강제수용하는 등의 사례들 처럼 말이다. 그로 인해 피해를 입어온 시민들이 있다는 사실 또한 막연히 느끼고 있으며, 그 대상이 자신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는 한다.추상적인 존재로서의 국가가 사회와 시민 개개인을 지킨다는 것은, 그 사회를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대전제다. 하지만 특히 한국이라는 국가는 주변의 적국들로부터 국가의 존속을 지킨다는 존재 목적을 우선시했으며, 시민 개개인의 안전과 이익을 지키는 것은 제1순위 목적이 아니었다. 심지어 국가의 존속을 지킨다는 목적으로 시민 개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목숨까지 빼앗는 일도 숱하게 일어났다. 1980년 5월 18일에 광주에서 있었던 국가 폭력은 그 중 가장 심각한 사례로 꼽힌다.나아가, 국가 또한 개개인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집합체이다 보니, 국가를 구성하는 조직원 개개인의 판단과 이해관계를 우선시해 조직 바깥에 존재하는 시민들에게 피해를 입힌 경우도 일어났다. 특정 공무원들이 자신의 임기 중 실적을 올리기 위해 시민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순환배치돼 다른 보직으로 간 뒤에는 모른 척 하는 경우를,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직원을 상대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봤을 터다.이처럼 국가에 의해 사회와 시민 개개인이 피해를 입는 구조가 100여 년간 이어지다 보니, 시민들은 국가가 추진하는 사업에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이다. 이로 인해 국가가 선의의 목적으로 추진하는 사업까지도 시민들의 반대 때문에 추진되지 못해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가 피해를 입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국가나 언론에서는 시민들의 이러한 행동을 ‘민원’이라 부르며 비판한다. 하지만 지난 100여 년간 한국에서 일어난 상황을 돌이켜보건대, 이 악순환의 시작은 시민이 아닌 국가(조선왕조·조선총독부·한국정부)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이 글에서는 국가가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이 피해를 입은 경우를 ‘행정 실패’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과거의 몇몇 행정 실패 사례를 되짚어봄으로써, 앞으로 행정 실패를 줄일 수 있는 힌트를 독자분들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시민 이주’는 가장 최악의 행정 실패다가장 심각한 행정 실패 사례는, 각종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이나 택지 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에 걸쳐 시민들을 이주시키는 경우다.극단적인 경우로는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의 시민들이 겪은 세 번의 강제 이주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42년에 일본군이 비행장을 건설할 때 한 번, 1952년 미군이 이곳에 주둔할 때 두 번째, 그리고 한국 내의 미군 재배치 사업이 이루어진 2006년에 세 번째로 강제이주를 당했다.이 경우는 일본 제국주의와 미국 정부, 그리고 한국 정부까지 얽혀 수 십년에 걸쳐 시민들이 피해를 입은 극단적인 사례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정부에만 책임을 돌리기는 막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음에 소개하는 두 가지 사례는 충분히 예측가능한 행정을 펼칠 수 있었던 경우다.2023년, 대규모 삼성전자 공단이 있는 평택의 남쪽 지역인 지제동에 미니신도시를 개발한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다. 신도시 개발을 위해서는 기존에 살던 주민들을 이주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이들 주민 가운데는 앞서 소개한 미군 기지 재배치 사업과 관련해 2004년부터 시작된 고덕신도시 조성 사업 때 토지를 수용당해 이곳에 옮겨와 살게 된 경우가 있었다.아직 고덕신도시도 개발이 완료되지 않은 상황이니만큼, 정부는 이렇게 두 번의 이주를 강제당하는 시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섬세한 행정을 취할 수도 있었다. 1970년대 초 울산에 고리 원자력발전소가 지어질 때, 사업 대상지역 주민들은 이웃 마을로 이주했다. 그런데 2001년에 신고리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기로 정해지면서, 그 마을이 또 다시 사업 대상 부지로 정해졌다. 정부가 원전 건설을 진행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처음부터 원전 건설 부지를 넓게 설정했다면 이렇게 시민들이 두 번 이주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평택 고덕·지제 신도시나 고리·신고리 원자력발전소 건설 사례는 명백한 한국 정부의 행정 실패 사례다.두 번째로 살펴볼 행정 실패 사례는, 정치·행정 내부 논리로부터 비롯되는 낭비다. 특정 정치인·행정가가 사업을 추진했다가, 선거나 인사 발령을 통해 사람이 바뀌고 나면 앞선 사람이 추진했던 사업을 취소하는 경우다.전라남도 장성군에서는 민선 6~7기 군수가 지역의 색깔을 노란색으로 통일한다는 명목으로 공무원들에게 주택 색깔의 변경을 주장하다가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인권 침해 판단을 받았다. 이후 지자체장이 바뀌면서 도시브랜드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새로운 네이밍을 선정했다가 무산된 상황이다. 충청북도 증평군에서도 전임 군수가 내세웠던 ‘증가포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현재는 듣기 어렵다. 싱가포르 같은 강소도시가 되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괜찮은 캐치프레이즈였어서 아쉬움이 든다.이화동 벽화를 주민들이 직접 지운 사연한편, 전임 지자체장이 특정 건물을 보존하기로 했다가 후임 지자체장이 이를 취소하고 철거하는 사례도 많다. 이 때는 안전진단 등급이 낮게 나왔다거나, 시민들이 주차장을 원한다는 논리가 단골로 등장한다. 강원도 원주시에서는 역사가 오래된 단관극장인 아카데미극장 건물의 보존을 전임 시장이 추진했으나, 신임 시장이 이 정책을 변경하면서 극장 건물이 철거됐다.또 서울에서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전임 시장 시절 추진했던 종로구 창신동 재개발을 재추진하고 있다. 창신동은 도시재생사업의 모범사례로 거론되는 곳이다. 이곳은 한양성곽에 붙어있는 고지대여서,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어렵다 보니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세금이 많이 투입됐는데, 현재와 같이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면 결과적으로 그간 투입된 세금이 헛되이 쓰인 것이 된다. 세 번째 행정 실패는 현직 지자체장이나 공무원이 관광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자기가 관할하는 지역에 관광객이 더 많이 오게 만들겠다면서 다른 지자체의 성공사례를 베끼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그 지역만의 특성이 사라져버리고, 또 그곳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바람에 시민들이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울 대학로 근처, 한양성곽 옆에 자리한 이화동에 벽화마을이 조성됐다가 사라진 경우다. 당시 낙후된 지역에 벽화를 그리면 관광객이 찾아오고, 그러면 지역이 활성화된다는 논리에서 골목마다 천사 날개가 그려졌었다. 하지만 현지 주민들이 아닌 외지 자본이 가게를 열어서 이익을 얻고, 외지인들이 골목 구석구석까지 들어오는 바람에 지역 주민들은 사생활 침해까지 당했다. 그 결과 지역 주민들이 벽화를 지워버린 것이다.광주 양림동이나 부산 이송도마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돼 결국 원주민이 밀려나고 외지인이 지역을 점령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인천 배다리에서는 지자체가 지역 활성화를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하자, 외지 자본이 건물을 매입하고 임대료 인상을 요구하는 바람에 기존 업체들이 위기감을 호소하기도 했다. 정부 구성원들이 무책임하게 행정을 추진한 바람에, 기존 시민들이 생존의 위협을 겪고 결국 밀려난 이런 사례들을 전국에서 쉽게 접한다.시민들, 지자체 행정 소식에 더 관심 기울여야최근에는 천사 날개 벽화에 이어 출렁다리가 전국 지자체에서 유행이다. 몇 년 전에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을 방문했을 때 수도권전철 3호선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양 옆 광고판에 지자체 두 곳의 출렁다리 홍보 광고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출렁다리는 전국에 한 두 곳 지어졌을 때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고 신기해하지, 이렇게 국내 전 지역에 대거 들어서면 더 이상 관광자원으로서 기능하지 못할 수 있다. 또 출렁다리를 만든다고 세금을 들인만큼의 관광 유발 효과가 일어난다는 보장도 없다. 강원도 원주의 간현관광지는 국내 최대 규모의 출렁다리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2023년 말 시점으로 누적 적자 7억원을 기록했다.특정 사업을 추진한 직후에는 반짝 효과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그 사업을 추진한 관계자는 좋은 평가를 받아 선거에서 재선되거나 좋은 보직으로 옮겨가게 된다. 하지만 그 사업이 장기화되면서 반짝 효과가 끝나고 결과가 나쁘게 드러났을 때, 해당 관계자는 이미 그 자리에 없고 책임도 지려 하지 않는다. 또 전임자의 행정이 좋은 결과를 낳았을 경우에도, 후임자는 전임자의 사업을 이어받기보다는 이를 폐기하고 자신의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려는 경향이 있다.행정 실패를 막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자기 지역의 행정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장기적으로 그 결과를 추적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각자의 생업에 바쁜 시민들이 국가의 행정 실패를 추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낸 세금을 정부가 낭비하고 그 결과 내가 피해를 보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좀 더 깨어있고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야 정부 구성원들이 시민을 무서워하고 시민의 눈치를 보며 행정을 펼치게 될 것이다.김시덕 도시문헌학자

2025.11.15 09:00

6분 소요
'루브르 도난사건'으로 본 그들이 '예술품'을 훔치는 이유 [백세희의 컬처&로(LAW)]

전문가 칼럼

지난달 19일 세상을 놀라게 한 절도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도난 사건이다. 프랑스 왕가의 귀중한 보석 8점이 도난당했다. 나폴레옹과 나폴레옹 3세 부인 외제니 황후의 왕관·목걸이·브로치 등 1460억원 이상의 가치를 갖는 유물들이 사라졌다. 그야말로 세기의 절도 사건이다.절도 사건 이후 세계 57개 박물관장들은 ‘모든 기관은 도난 위협을 받는다’며 루브르를 응원하는 연대의 뜻을 보냈다. 또 루브르 도난 나흘 전에는 미국의 한 박물관에서도 소장품 1000점을 도둑맞은 소식이 뒤늦게 전해지는 등 예술품 도난에 대한 관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번 루브르 사건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박물관(미술관) 절도 사건은 종종 발생해 왔다. 다만 절도한 작품이 너무나도 유명한 탓에 현금화하는 과정에서 곧바로 들통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유명한 예술품은 도데체 왜 훔치는 것일까. 내다 팔기도 어려울 것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그 나름의 이유는 있지 않을까. 필자는 절도범의 의중을 기준으로 유명 예술품을 훔치는 이유를 ①경제적 절도 ②정치적 절도 ③개인적 절도 ④도무지 알 수 없음, 이렇게 네 가지로 나눠 봤다.돈이 필요해서 - 경제적 이유의 절도유명한 작품은 세상에 유일무이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단순히 남의 집에서 텔레비전이나 노트북을 훔쳐다가 파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누가 언제 만든 작품이고, 지금까지 누구의 손을 거치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명한 작품이 도난당한 즉시 시장에서 유통되는 일은 흔치 않다.돈을 목적으로 훔친 것이라면 대체로 이 작품은 지하 세계를 전전한다. 그곳에서 화폐의 대용물이나 담보물로 이용되기도 하며, 국경을 넘나들며 이른바 ‘돈세탁’의 수단으로 쓰인다. 범죄자들은 훔친 작품을 다른 중개매매상이나 경매사에 판매해 불법적인 대가를 얻는다. 이를 숨기기 위해 그 돈으로 (정상적으로 유통되는) 다른 작품을 구매하고 되파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최종적으로 범죄와 무관한 듯한 자금을 만든다. 이렇게 암시장을 전전하던 작품은 시간이 흐른 후 도난당한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시 등장한다.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대부분 작품이 도난품인 줄 모르고 구매한 선의취득자가 최종적으로 소유권을 얻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들에 의해 작품은 합법적인 예술품 시장에 안착한다. 설혹 그 작품이 오래 전 도둑맞은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더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절도범을 찾기는 어려워지고, 아예 공소시효가 만료되기도 한다.지하 시장보다 더 노골적인 방식도 있다. 예술품 소유자나 도난 보험금을 지급해야 하는 보험회사에게 작품을 돌려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는 방법, 즉 ‘예술품 납치’(art-napping)다. 절도범은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작품을 불태워버리겠다고 협박한다. 특히 절도범들은 작품이 끝내 소실됐을 때 그들이 소유자에게 지급해야 하는 거액의 보험금보다 적은 금액을 보험사에 ‘몸값’으로 요구한다. 이에 이런 방식의 범죄가 종종 성공한 사례도 있다. 메시지를 전하고자 - 정치적인 이유의 절도절도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1911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이뤄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절도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도난 사건일 것이다. 스페인의 화가 파블로 피카소도 용의자로 붙잡혀 조사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모나리자’는 2년 뒤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발견된다. 범인은 이탈리아 출신의 전직 루브르 박물관 직원인 빈센초 페루자인데(그가 작품 보호액자를 제작한 유리공이라는 얘기도 있다),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작품을 팔려다가 체포됐다.그는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예술품들을 약탈해간 것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러한 범죄를 계획했다고 주장했다. 또 ‘모나리자’를 훔친 것은 조국인 이탈리아에 이를 다시 돌려놓고자 하는 애국심의 발로였다고 강조했다. 이 사건으로 빈센초 페루자는 조국인 이탈리아에서는 영웅이 됐다. 아울러 당시 다른 르네상스 걸작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유명했던 ‘모나리자’는 이를 계기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가 됐다. 더 파괴적인 행위도 있다. 2001년 3월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탈레반의 최고지도자인 물라 오마르의 명령에 따라 세계문화유산인 ‘바미안 불상’이 파괴됐다. 탈레반은 전 세계에 테러로 인한 공포와 경악을 확산시켜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확대할 목적으로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인질로 삼았다. 그리곤 이를 보란 듯이 파괴해 세상을 경악에 빠뜨렸다. 예술품, 특히 문화재는 온전히 보존돼야 한다는 보편적인 공감대를 악용하는 수법이다.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작품을 훔친다면 정치적인 목적을 의심해 볼 만하다. 그림이 유명할수록 ‘선의취득’ 제도에서의 취득자의 선의(도품인 줄 몰랐다는 것을 의미) 요건을 갖출 가능성은 줄어드는 반면, 그 작품을 인질로 삼은 정치적 주장의 파급력은 더욱 크기 때문이다. 다만 ‘모나리자’ 절도 사건의 경우 조금은 다른 사례로 봐야할 것 같다. 당시에는 ‘모나리자’ 작품이 지금만큼 유명하지 않았다. 절도범인 빈센초 페루자가 피렌체의 한 미술관에 이 작품을 판매하려 한 것도 도난 사실이 발각되지 않을 것으로 본 것 같다. 내가 갖고 싶어서 - 사적인 동기의 절도특정 작품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신이 직접 간직하며 혼자 보기 위해 절도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소장목적 절취행위’의 유명한 예로는 클로드 모네의 ‘푸르빌 해변’ 절도 사건을 들 수 있다. 2000년 폴란드 포즈난 국립미술관은 ‘푸르빌 해변’을 도난당했고 그로부터 10년 만인 2010년 1월 작품을 되찾았다. 범인은 범행 당시 액자에서 작품을 오려내 복사본으로 바꿔 걸어 놓았다고 한다. 경찰은 범행 현장에 남겨진 지문 등을 분석해 용의자의 신원은 확인했지만, 그의 행방은 찾지 못했다. 오랜 기간 추적 끝에 붙잡힌 범인은 41세의 남성으로 모네의 작품을 경외하다가 그와 같은 범행을 저지르게 됐다고 자백했다. 훔친 작품을 팔아 경제적인 이득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이 소장하고 감상하기 위한 절도의 경우 결코 유통시장에 다시 나타나는 일이 없다. 그래서 영영 작품의 행방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절도 사건1997년 2월 22일 이탈리아 북부 도시 피아젠차의 리치 오디 미술관 내 전시실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여인의 초상’이 23년 만인 2019년 12월 발견됐다. 이 사건은 ‘등잔 밑이 어두웠던’ 경우인데, 발견된 곳이 같은 미술관 외벽 속의 작은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원사가 미술관 건물 벽을 덮은 담쟁이덩굴을 제거하다가 네모난 모양의 작은 금속 문을 발견했고, 그 안에서 검은 쓰레기봉투에 담긴 그림을 찾아냈다. 1997년 절도범들은 지붕의 채광창을 통해 갤러리에 진입하고 나중에 지붕을 통해 달아난 것으로 추정했다. 그 이후로 23년이 다 되도록 절도범이나 없어진 이 그림에 관한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은 절도범들이 시간이 흘러 수사당국이나 언론의 관심이 희미해지면 나중에 찾아가려고 바로 그 미술관에 숨겨놓았던 것 같다고 의심했다. 반면 일부에서는 단지 자신들의 절도 실력을 과시하거나 장난으로 ‘등잔 밑’에 숨겨놓은 것이 아니겠냐고 말하기도 했다.이 그림은 2020년 초 최종적으로 진품으로 판명됐고, 그로부터 얼마 후 두 명의 남자들이 자신들이 이 그림을 훔쳤다고 자백했다. 하지만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이미 지났기 때문에 앞으로 그 사건에 대한 조사가 자세히 이루어지지는 않으리라 예상되었다. 이후 우리나라에까지 후속 보도가 전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흐지부지 끝나고 만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훔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처벌은 대개 ‘절도죄’가 적용된다. 야간에 침입한 것인지, 여러 명이 합동한 것인지 등에 의해 가중처벌이 정해지는 정도이다. 증거에 의한 사실인정의 문제가 남을 뿐, 특별한 이론적인 논란은 자주 발생하지 않는 편이다. 오히려 문제의 작품을 무사히 회수할 수 있는지가 더 큰 관심거리이다. 루브르에서 도둑맞은 아름다운 보석 작품들은 다시 빛을 볼 수 있을까? 유럽에 있다는 왕실 보석 암시장과 콜렉터의 서랍 속에서 깊은 잠을 자게 될까? 되찾았다는 뉴스가 들려오길 바란다. 나도 아직 보지 못했으니까!백세희 법률사무소 아트앤 대표변호사

2025.11.14 10:00

6분 소요
봉화, 자연의 시간에서 도시의 다른 가능성을 보다[김현아의 시티라이프]

전문가 칼럼

서울은 너무 완벽하다. 거대한 시스템이 매일 같은 속도로 회전하고, 정책의 나침반도, 언론의 헤드라인도 언제나 그곳을 향한다. 모든 데이터와 인덱스, 정부의 평가 기준조차 서울을 표준(Standard)으로 삼는다. R&D 투자, 고급 일자리, GTX와 같은 거대 교통 인프라는 오직 서울의 효율을 높이는 데 집중되며, 대한민국의 모든 자원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중력이 된다.도시는 효율적으로 진화했지만, 그 속도는 인간의 숨결보다 빠르다. 거리에선 경쟁이 일상이 되고, 집은 자산이 됐으며, 시간은 통화처럼 거래된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평생 서울 중심의 도시정책과 부동산 정책을 설계하고 자문해왔다. 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드는 데 일조했던 것이다. 아니 많은 전문가들이 나와같은 일들을 해왔다. 우리가 해오던 '효율적인' 주택 공급 정책과 '빠른' 도시계획이, 결국 천정부지로 솟은 서울의 집값과 그 눈부신 성장의 그림자 뒤로 텅 비어가는 지방의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이 '완벽한 시스템'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모든 답이 서울에 있다는 그 믿음이 오히려 수도권 집중 심화, 일극화, 지방소멸을 가속시키고 있었다. 나는 다른 답을 찾기위해 요즘 지방 도시들을 직접 방문하고 있다. 자료나 통계가 아닌 도시가 어떻게 작동하고 멈추는지를 그리고 한 도시의 속도를 직접 체험해 보기 위해서다. 103개의 정자, 봉화의 시간첫번째 소개할 도시는 경북 봉화군이다. 이쯤이면 송이버섯 축제를 떠올릴 이곳 봉화에서 나는 엄청난 도시의 기록과 시간을 경험했다. 이 도시는 다른 리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도로는 한산했고,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정말 조용했다. 상가는 이른 저녁이면 문을 닫고 북적이는 인파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 나는 서울과는 다른 밀도를 느꼈다. 서울의 시간이 '거래'와 '소비', '경쟁'으로 촘촘히 채워져 있다면, 봉화의 시간은 '자연의 순환'과 '사계의 흐름'으로 채워져 있었다. 봉화의 ‘정자문화생활관’은 이 도시의 정체성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장소였다. 현지인에게 들으니 전국의 정자가 약 600여 개인데, 그 중 103개의 누정(樓亭)이 봉화에 있다고 했다. 하나의 군 단위 지역에 이 정도의 밀도라면, 단순히 유적의 숫자가 아니라 삶의 태도가 공간에 새겨진 결과다. 생활관 마당에는 다섯 채의 정자가 복원돼 있었다. ‘정자’란 단순히 풍류를 즐기던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학문이 논의되고, 풍경이 철학이 되던 자리였다. 나는 문득 서울의 공간들을 떠올렸다. 서울의 카페가 '네트워킹'과 '정보 교환'을 위한 공간이고, 고층 빌딩의 회의실이 '성과'와 '결과'를 내기 위한 공간이라면, 봉화의 정자는 아무런 목적 없이 '그냥 머무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시간은 효율로 측정되지 않고, 그저 존재함으로 완성되는 것 같았다. 문뜩 이 너른 마당에서 요가나 명상 같은 프로그램이 열린다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했다. 그건 단지 체험행사가 아니라 ‘머무름’의 가치를 다시 인식하는 일이 될 것이다.봉화가 품은 시간의 결은 단순히 자연 속에 '머무름'에만 있지 않았다. 나는 닭실마을의 충효당(忠孝堂)과 그 앞에 선 낯선 이국의 동상을 마주했다. 이 동상은 놀랍게도 베트남 리 왕조의 시조인 '리 태조(Lý Thái Tổ)'였다. 800여 년 전, 왕조의 멸망을 피해 바다를 건넌 그의 후손(화산 이씨)이 머나먼 이곳 봉화에 정착했다. 그리고 이들은 망국의 후손으로 숨어 지낸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역사가 되었다. 충효당의 기둥에서 나는 7대손 이장발(李長發) 장군이 임진왜란을 맞아 남긴 시를 보았다. 스무 살의 청년은 충주 탄금대에서 자신들의 새 조국(朝鮮)을 위해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모든 것을 효율과 개발의 논리로 덮어버리고 과거를 쉽게 지우는 서울의 시간 속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수백 년을 이어온 '기억'과 '연대', '충효'의 시간이 이 조용한 고을의 또 다른 밀도를 증명하고 있었다.'낙후'라는 편견, '느림'이라는 자산봉화의 면적은 약 1,202㎢로 서울(약 605㎢)의 두 배에 달하지만, 인구는 2만8000여명(2024년 기준) 남짓이다. 서울의 한 개 동(洞) 인구와 비슷하다. 그나마 83%가 임야이다. 효율의 기준으로는 낙후지만, 삶의 밀도로 보면 가장 인간적인 도시였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낙후', '쇠퇴', '소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그 단어들은 '서울 중심의 효율성'이라는 단 하나의 잣대로 지방을 재단하는 편견의 언어다. 봉화의 '느림(Slowness)'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서울과 같은 거대 도시가 잃어버린 가장 중요한 '자원(Resource)'이다. 봉화에 닿기 전, 영주와 안동을 거쳤다. 영주는 한때 중앙선과 영동선이 교차하며 사람과 물자가 들끓던 '철의 도시'였다. 안동은 경북 북부의 행정과 문화를 아우르던 '중심'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도시들에서 본 것은 '단절'과 '고립'의 흔적이었다. 수도권이 거미줄 같은 교통망(GTX 등)과 자본으로 서로 '연결'되며 거대한 시너지를 내는 동안, 지방은 서울로 향하는 '빨대(KTX, SRT)'만 꽂힌 채 지역 간의 수평적 연결은 쇠퇴했다. KTX가 서울-안동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동안, 이 도시들 사이를 잇던 모세혈관 같은 지역 내 연결망은 오히려 끊어지고 말았다. 이 '연결의 상실'이야말로 내가 목격한 지방 문제의 또 다른 본질이다. 나는 지방의 소멸을 애도하지 않는다. 대신 그 다른 시간을 기록하려고 한다. 이번 ‘지방의 시간을 기록한다’ 첫 번째 여정은 봉화의 '정자'에서 '머무름의 철학'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앞서 스쳐 지나간 영주와 안동의 풍경에서 보았듯, 지방의 문제는 단순히 '느림'의 찬미로 끝나지 않는다. 수도권이 거대한 '연결'의 힘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동안, 지방은 왜 '단절'되고 '고립'되었는가? 이 연결의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이어가고자 한다.(다음편에 계속)

2025.11.0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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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타에서 하리오까지…핸드드립 커피의 역사 [심재범의 커피이야기]

전문가 칼럼

1908년 독일 드레스덴. 평범한 가정주부 멜리타 벤츠는 탁하고 쓴맛이 강한 커피에 늘 불만을 느꼈다. 당시 유럽에서 쓰이던 금속망이나 천 필터는 미세한 가루를 걸러내지 못했고, 잔 바닥에는 늘 불쾌한 찌꺼기가 남았다. 멜리타는 아들의 공책에서 흡수성이 좋은 종이를 뜯어내 구멍을 뚫은 주석컵에 깔고 커피를 내려 봤다. 놀랍게도 맑고 깨끗한 커피가 잔에 담겼다. 인류 최초의 브루잉 커피인 ‘핸드드립 커피’가 시작된 순간이었다.그는 곧바로 특허를 내고 ‘멜리타’(Melitta)라는 회사를 세웠다. 최초의 커피 장비 회사로 출발한 멜리타는 꾸준히 제품을 개발하며 성장했고, 21세기 들어 연 매출 3조원 규모의 다국적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이전까지 커피가 끓여 마시는 음료였다면, 멜리타 드리퍼의 등장으로 커피는 내려 마시는 음료, 곧 브루잉 커피로 바뀌었다. 멜리타 이후 가정에서도 커피를 손쉽게 즐길 수 있게 되면서, 100년 넘게 이어진 커피 소비 확대의 토대가 됐다.칼리타와 핸드드립 커피의 정착브루잉 커피 문화는 곧 일본으로 전해졌다. 전후 경제가 살아나던 1950년대 일본에서 커피는 서양적 낭만과 일상의 여유를 동시에 상징했다. 전국에 기사텐(喫茶店·끽다점)이 생겨나며 커피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 생활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음악을 듣고 담소를 나누며 커피를 마시는 일은 곧 서구 문화를 경험하는 방식이었다.1958년 요코하마에서 출발한 칼리타는 멜리타의 단점을 보완한 드리퍼를 내놓았다. 멜리타가 단일 구멍 구조여서 물줄기에 따라 맛이 달라졌다면, 칼리타는 바닥이 평평하고 세 개의 배수 구멍을 둬 보다 균일한 맛을 보장했다. 일본의 기사텐 마스터들은 이 도구를 활용해 커피를 배우고 가르치며 도제식 학습 문화를 만들었다. 커피를 내리는 과정은 단순한 손재주가 아니라 장인의 수련 과정으로 여겨졌고, 한 잔의 커피에는 기술과 정성이 담겼다.쇼와 시대의 성장과 함께 일본 핸드드립 문화는 꾸준히 확산했다. 물줄기를 세심히 조절하고 시간을 기록하며 온도를 맞추는 과정은 단순한 조리가 아니라 하나의 의식 같은 행위로 자리매김했다. 칼리타 드리퍼는 한국의 ‘1서3박’ 세대 같은 초기 커피 마스터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한국과 일본의 다방 문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아시아 전역으로 퍼졌고, 나아가 20세기 말 미국과 유럽에서 태동한 스페셜티 커피 산업에도 자극을 줬다. 하리오 V60과 스페셜티 커피의 시대칼리타가 안정성과 장인의 미학을 제공했다면, 2004년 등장한 하리오 V60는 개성과 과학을 결합한 도구였다. 일본의 유리 전문 기업 하리오는 60도 원뿔형 구조와 나선형 리브, 단일 배수구멍을 결합한 V60 드리퍼를 출시했다. 종이 필터가 드리퍼 벽에 달라붙지 않도록 한 설계는 공기 통로를 만들었고, 넓은 배수 구멍은 추출 속도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도록 했다.21세기 초 스페셜티 커피 붐이 일던 미국과 유럽의 젊은 바리스타는 기존 드리퍼의 높은 난이도에 부담을 느꼈다. 하리오 V60는 저울과 온도계를 활용해 변수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고, 숙련자에게는 창의적 해석의 자유를 줬다. V60는 빠르게 세계 무대에 올랐다. 2000년대 후반 이후 월드 브루어스 컵(WBrC) 대회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도구가 됐고, ‘핸드드립’이라는 표현은 점차 국제 표준어인 ‘푸어오버’(Pour Over) 혹은 ‘브루잉’(Brewing)으로 바뀌었다. 칼리타 웨이브, 에어로프레스 같은 새로운 도구가 등장하며 브루잉 커피의 세계는 더욱 다양해졌다.지난 8월 30일, 서울 성수동에서는 하리오 V60 출시 20주년을 기념하는 브루어스 컵 한국 대표 선발전이 열렸다. 우승자는 유대연 바리스타였다. 그는 도쿄 스페셜티 커피 전시회(SCAJ) 2025 무대에서 각국 대표와 맞붙게 된다. 이 대회는 브루잉 커피 역사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었다.세계인의 일상이 된 핸드드립 커피독일에서 시작하고 일본에서 발전한 핸드드립 커피 문화는 한국과 아시아를 거쳐 서구 스페셜티 커피 산업으로 이어졌고, 이제는 전 세계인의 일상이 됐다. 최근에는 ▲지속가능성 ▲윤리적 소비 ▲로컬 로스터리의 부상 등 새로운 흐름과 결합하며 커피 문화가 또 한 번 변화를 겪고 있다. 스타벅스가 세계적으로 확산시킨 에스프레소 문화가 프랜차이즈 커피를 키웠다면, 브루잉 커피 덕에 전 세계 가정에서 누구나 쉽게 커피를 즐길 수 있게 됐다. 오늘날 커피 시장은 양극화 속에 놓여 있다. 기후 변화와 자본의 영향으로 국제 커피 지수는 급등하고, 저가 커피 브랜드는 비용 압박에 흔들린다. 품질과 개성을 내세운 스페셜티 커피는 여전히 성장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멜리타 벤츠가 우연히 시작한 드리퍼는 일본의 칼리타와 하리오를 거치며 발전했고, 브루잉 커피의 역사는 전세계 커피 애호가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인류 최고의 음악가 베토벤은 매일 아침 60알의 원두를 세어가며 일관된 커피를 내려 마셨다. 청각을 잃어가는 절망 속에서도 커피 한 잔의 여유가 그의 마지막 작품을 지탱했듯이 2025년 분열과 혼란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커피 한 잔이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2025.11.0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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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U 26만장과 AI발 일자리 감소 바람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그래픽 처리 장치인 GPU(Graphics Processing Unit)는 컴퓨터의 영상 정보를 처리해 모니터에 뿌려주는 부품으로 게이머들이 CPU(Central Processing Unit, 중앙 처리 장치)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기는데요, 인공지능(AI)이 등장하면서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있습니다. 복잡한 계산을 순서대로(직렬) 하는 CPU와 달리, 단순한 계산 수천 개를 동시에(병렬) 처리할 수 있어 수많은 데이터를 동시에 학습하고 패턴을 찾아야 하는 AI 딥러닝에 GPU만 한 게 없어서입니다. GPU가 AI 훈련의 속도·규모·비용을 결정지어 AI의 두뇌이자 엔진으로 불릴 정도로 핵심 하드웨어로 자리 잡으면서 이를 얼마나 보유하고 있느냐가 AI 경쟁력의 척도가 되고 있습니다. 이에 각국은 사실상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엔비디아를 상대로 한 GPU 확보전에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닌데, 최근 희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경주 APEC’ 기간에 방한해 이재명 대통령에게 최신 GPU 26만장을 한국에 우선 할당하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AI 3대 강국 도약을 위해 2030년까지 GPU 20만장을 확보하겠다고 했는데, 이를 훌쩍 넘는 수량입니다. 젠슨 황의 약속이 지켜진다면 한국은 미국(약 2000만장)과 중국(약 150만장)에 이어 세계 3위 GPU 보유국(기존 4만5000장 포함 30만장)이 되면서 의심 가득했던 AI 3대 강국의 꿈이 잘하면 가능하겠다는 실현 가능한 꿈으로 바뀔 것으로 기대됩니다. 정부는 여기에 예산을 뒷받침할 예정인데요, 내년도 AI 예산을 올해보다 3배 이상 늘어난 10조1000억원으로 편성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국회 시정연설에서 내년도 예산안을 설명하면서 “2026년 예산안은 AI 시대를 여는 대한민국의 첫 번째 예산”이라며 “박정희 대통령이 산업화의 고속도로를 깔고, 김대중 대통령이 정보화의 고속도로를 낸 것처럼, 이제는 AI 시대의 고속도로를 구축해 도약과 성장의 미래를 열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정부가 AI 산업 육성에 진심인 데다가 GPU 확보에도 청신호가 켜진 만큼 AI가 전 산업계로 빠르게 확산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특히 로봇과 자율주행 등 ‘피지컬 AI’ 분야에서 선도국이 되겠다는 계획이어서 제조 강국인 한국의 ‘AI로의 대전환’이 어느 나라보다 빠를 것으로 보입니다. 인터넷 도입으로 세계적인 디지털 사회로 전환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마냥 환영할 수만은 없는데요, AI 시대가 빨라지는 만큼 일자리도 빠르게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실제로 AI를 주도하고 있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뿐 아니라 물류·항공 기업도 직원들을 대거 해고하거나 계획하고 있는데, 아마존 1만4000명, MS 1만5000명, 인텔 2만2000명, UPS 4만8000명 등입니다. AI발 일자리 감소가 빠르게 현실화하고 있는 것으로, 한국도 예외일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에 대한 논의도, 대비도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AI 산업을 육성하면서 동시에 일자리 감소 문제도 해결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피하거나 늦출 수도 없습니다. 정부도, 기업도, 노동자도 이 고차 방정식을 푸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2025.11.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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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1등급의 벽, 서울과 지방 간극은 더 넓다 [임성호의 입시지계]

전문가 칼럼

성적 상위권 학생 비율을 기준으로 할 때, 상대평가 과목인 국어·수학보다 절대평가 과목인 영어에서 지역 간 격차가 더 크게 벌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최근 4년간 수능 데이터를 보면, 영어는 1·2등급 구간 모두에서 서울과 지방의 성적 격차가 다른 과목보다 두드러졌다.현행 통합수능은 2027학년도를 끝으로 종료된다. 2022학년도부터 6년간 시행 중인 현 제도는 국어에서 ‘언어와 매체’ ‘화법과 작문’, 수학에서 ‘미적분’ ‘기하’ ‘확률과 통계’ 중 하나를 선택해 응시하는 방식이다. 미적분과 기하는 이과생이, 확률과 통계는 문과생이 주로 선택했다. 같은 원점수를 받아도 선택 과목에 따라 표준점수가 달라지는 구조 탓에, 이른바 ‘문과 침공’ 현상이라는 말이 생겼다.하지만 2028학년도 입시부터는 이 같은 선택과목이 사라진다. 수학 범위가 문과 기준으로 축소되고, 문·이과 구분 없이 사회·과학탐구 과목을 모두 응시해야 하는 형태로 바뀐다. 평가 체계는 현재와 동일하게 국어·수학·탐구는 상대평가, 영어는 절대평가를 유지한다.지역 간 편차 다른 상위권2022학년도부터 실시된 통합수능의 결과를 보면, 과목별로 상위권 학생 비율의 지역 간 편차가 다르게 나타난다. 고3 학생을 기준으로 상위 4% 이내 국어 1등급 학생 비율은 2022학년도 서울이 4.3%로 가장 높았고, 최저 지역은 1.4%로 격차는 2.9%p였다. 2023학년도에는 3.7%p, 2024학년도 3.5%p, 2025학년도 3.7%p로 비슷한 수준이 유지됐다. 17개 시도 중 최고 비율은 모두 서울이었다. 2등급 이내로 범위를 확대하면 격차는 7.4~8.5%p까지 벌어졌다.수학은 1등급 학생 비율의 지역 간 차이가 2022학년도 4.4%p, 2023학년도 5.1%p, 2024·2025학년도 각각 4.4%p였다. 2등급 이내에서는 10.2~11.0%p 격차가 나타났다.절대평가인 영어는 상대평가 과목보다 격차 폭이 더 컸다. 1등급 학생 비율의 지역 간 차이는 2022학년도 5.4%p, 2023학년도 7.0%p, 2024학년도 5.2%p, 2025학년도 5.9%p로 나타났다. 2등급 이내로 확대하면 14.9~16.6%p까지 격차가 벌어졌다.국어·수학은 상대평가 방식으로 매년 난이도에 관계없이 일정 비율의 등급이 정해지지만, 영어는 절대평가이기 때문에 난이도에 따라 등급 비율이 크게 요동친다. 이 때문에 절대평가 과목이 지역 간 격차를 줄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상황에 따라서는 상대평가 과목보다 격차를 키운 경우도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서울과 지방 간 단순 평균을 비교해도 흐름은 비슷하다. 국어는 2022~2025학년도 동안 1등급 구간에서 2.3~3.0%p, 2등급 이내에서 5.5~6.6%p의 격차가 발생했다. 수학은 1등급 구간에서 3.5~3.9%p, 2등급 이내에서 8.1~8.6%p였다. 영어는 1등급 구간에서 4.0~5.3%p, 2등급 이내에서는 11.0~11.9%p로 격차 폭이 가장 컸다. 절대평가의 변동성 우려결국 절대평가 과목이 지역 간 격차를 완화하기는커녕, 오히려 변동성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시험 난이도에 따라 고득점자 비율이 급격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평가는 난이도와 상관없이 일정 비율의 등급을 보장하지만, 절대평가는 한 해의 출제 수준에 따라 1·2등급 비율이 크게 달라져 특정 지역이나 학교의 평균을 더 벌릴 가능성도 있다.전문가들은 “상대평가와 절대평가가 혼합된 현재의 수능 체제에서, 두 방식이 학교·지역 간 격차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고득점자 비율이 지역별 학력 수준의 차이뿐 아니라 출제 난이도와 맞물려 달라질 수 있는 만큼, 단순히 제도 변경만으로는 지역 불균형 해소가 어렵다는 것이다.2028학년도부터 새로운 수능 체제가 도입되지만, 또다시 ‘2032학년도 개편설’이 거론되고 있다. 현 초등학교 6학년이 치르게 될 차기 수능을 겨냥한 변화 논의가 이미 시작된 셈이다. 교육부는 수능 부담 완화라는 큰 틀을 유지하되, 지역·학교 간 격차 문제를 더 세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결국, 수능 체제가 어떻게 바뀌든 간에 ‘평가의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그 결과가 지역별 학력 격차를 좁히느냐 넓히느냐다. 절대평가의 취지가 성취 수준을 객관화하는 데 있다면, 실제로는 지역별 격차를 더 벌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제도 설계의 정교함이 요구된다.

2025.11.08 11:00

3분 소요
리더는 어떻게 혁신기업을 만드는가 [스페셜리스트 뷰]

전문가 칼럼

혁신기업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강렬한 울림을 준다. 기존 산업의 판도를 뒤흔들고, 기술의 흐름을 바꾸며, 새로운 인재와 자본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자석 같은 존재다. 우리는 엔비디아·구글·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기업들을 보며 ‘혁신’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린다.그들의 성공은 단순히 탁월한 기술력이나 운 좋은 시장 타이밍 때문만은 아니다. 혁신기업은 리더가 만들어낸 방향성과 문화, 실행 시스템, 그리고 리더 자신의 내면이 결합된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성과와 건강한 조직, 둘 다 가능한가?"와 같은 질문이 놓여 있다.성과 중심 조직과 건강한 조직은 흔히 상충하는 가치로 여겨진다. 강한 압박과 성과 중심 문화가 결국 구성원을 소진시키고 조직을 망가뜨린다는 비판도 많다. 그러나 실제로 혁신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기업들을 보면 이 둘 간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독특한 조직 역학이 존재한다. 이들은 성과를 내려면 문화를 희생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건강과 성과가 서로를 강화하는 구조를 설계해냈다.조직 건강을 단순히 '좋은 분위기'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맥킨지(McKinsey)는 건강한 조직을 “전략을 일관되게 실행하고,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며,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에너지를 발휘하는 상태”로 정의한다. 다시 말해 건강한 조직은 단순히 구성원이 편안한 곳이 아니라 성과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근육이 잘 발달된 상태다.실제로 맥킨지의 전 세계 1000개 기업 분석에 따르면 조직 건강 점수가 상위 25%에 속하는 기업의 총주주수익률(TSR)은 하위 25% 기업보다 평균 3배 이상 높았다. 분위기가 좋아서 성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성과를 낼 수 있는 구조와 문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건강한 것이다.물론 문화에 정답은 없다. 산업의 특성·인재 구성·기업의 역사와 맥락에 따라 조직마다 성공 방정식은 다르다. 실리콘밸리의 테크 기업과 한국의 반도체 기업, 금융회사와 스타트업이 같은 방식으로 혁신을 이룰 수는 없다. 하지만 산업과 국가, 규모를 불문하고 혁신기업의 리더십에는 공통된 축이 존재한다. 그것은 ▲방향성을 끊임없이 소통하는 리더십 ▲성과와 문화의 균형을 유지하는 감각 ▲조직의 틀과 리더십 기준을 세우는 역량 ▲리더 자신의 내면을 관리하는 힘이다. 방향성을 끊임없이 소통하는 리더혁신기업의 리더는 무엇보다 조직의 나침반이다. 인공지능(AI) 시대를 견인하고 있는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최고경영자)는 그 대표적 사례다. 1993년 설립된 엔비디아는 오랫동안 게임용 GPU(그래픽처리장치) 전문기업이었다. 하지만 젠슨 황은 10년 넘게 GPU가 인공지능 시대의 핵심 인프라가 될 것이라는 비전을 흔들림 없이 제시해왔다.그의 리더십은 기술에 대한 집착과 선구적 투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 그리고 독특한 조직 문화에 기반한다. 초기 GPU 시장의 성공을 넘어 그는 병렬 컴퓨팅의 잠재력을 일찌감치 인지하고 쿠다(CUDA)라는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구축했다. 이를 통해 엔비디아는 단순한 하드웨어 기업을 넘어 과학자와 개발자들이 GPU를 활용해 병렬 연산을 수행할 수 있는 플랫폼 기업으로 진화했다. 신경망 기술의 부상 또한 예견하고 GPU를 AI 시대의 핵심 플랫폼으로 전환했으며, 이 전략은 AI 칩 시장에서 엔비디아를 독보적 위치에 올려놓았다.그의 리더십 스타일도 주목할 만하다. ‘30년 된 스타트업’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듯, 그는 안일함에 젖지 않고 끊임없이 혁신하는 조직 정체성을 강조했다. 실패를 숨기지 않고 솔직히 공유하는 ‘지적 정직성’(Intellectual Honesty)을 중시했으며, ‘T5T 이메일 문화’(Today’s Top 5 Things)를 통해 전 직원이 매일 핵심 업무와 통찰을 공유하는 소통 구조를 만들었다. 수평적이고 개방적인 소통 문화는 혁신의 속도를 높였다.그는 주주 서한과 사내 미팅, 그리고 언론 인터뷰를 가리지 않고 같은 메시지를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의 말은 단순한 기술적 설명이 아니라 회사 전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그리는 서사였다. 덕분에 엔비디아는 전환점마다 조직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AI 가속기 시장을 선점할 수 있었다.이런 ‘방향성의 소통’은 생각보다 어렵다. 최고경영자가 100이라 생각하고 전달한 메시지는 중간관리층에서 약 30%씩 희석돼 최종 현장 구성원에게는 40% 수준만 전달된다. 실제로 다수의 조직 진단에서 경영진의 전략 방향성을 직원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비율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반대의 사례도 있다. 최근에 코칭을 수행했던 한 고객사 임원의 경우 “배경을 자세히 설명해주면 모두 이해할 것”이라 믿고 긴 설명을 반복했지만, 구성원들은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배경만 길게 나열하면 메시지는 오히려 흐려진다. 혁신 리더는 방향성을 두괄식으로 명확히 전달하고, 구조화된 스토리텔링으로 끊임없이 반복 소통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성과와 문화의 균형, 자전거 타기처럼혁신 과정에서 성과는 조직의 생명줄이다. 작은 성과가 없다면 구성원들의 열정은 쉽게 식고, 변화에 대한 불안은 증폭된다. 리더는 전략만 제시할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변화의 성공 가능성을 체감할 수 있는 작은 마일스톤을 만들어내고, 이를 조직 전체가 함께 축하하며 학습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이런 경험은 구성원들에게 “이 길이 실제로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다.SK하이닉스는 이런 방식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꾼 대표적 사례다. SK하이닉스는 2023년 메모리 업황 급랭으로 10여 년 만의 분기 적자를 기록했지만, 감산·투자조정과 동시에 고대역폭메모리(HBM) 중심의 제품 믹스로 전환하며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2025년에는 동적 RAM(DRAM) 매출 기준 분기 1위를 차지하거나 역전이 가시화될 정도로 경쟁구도가 흔들렸고, HBM 시장에선 일부 분기 70% 안팎의 점유율로 AI 메모리 리더십을 굳혔다. 세밀한 실행관리와 현장 리더십이 반복 가능한 ‘작은 승리’를 축적하며 조직의 속도를 끌어올린 결과다. 혁신은 거대한 한 번의 도약이 아니라 리더가 만들어낸 작고 반복되는 성취의 축적이다.물론 문화적 토대 없이 성과만 강조하는 조직은 오래 가지 못한다. 구글의 유명한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 연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 창의적 문제 해결과 혁신이 가능해진다.하지만 지난 2016년 이후 조직문화를 강조해온 기업들의 사례에서는 최근 반대의 경우도 관찰된다. 심리적 안전감과 수평 문화를 잘못 이해하고 절대선처럼 추구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과도하게 ‘편안함’을 강조하는 문화에서는 의사결정이 느려지고 성과 기준이 흐려진다. 'Raising the bar'(더 높은 성과와 품질을 목표로 설정하기)의 문화가 사라지고 조직은 점점 평균에 안주하게 된다.심리적 안전감은 편안함이 아니라 도전이 가능한 환경이다.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의 몰입 이론(flow theory)도 이를 뒷받침한다. 익숙한 영역을 살짝 벗어난 과제가 주어질 때 인간은 몰입하고 성장한다. 조직문화는 전염성이 강하다. 성과 기준이 한 번 낮아지면 회복은 쉽지 않다. 혁신 조직은 심리적 안전감과 성과 압력이라는 두 축의 균형 위에서 유지된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자전거가 넘어지듯 조직은 균형을 잃는다. 조직의 틀과 리더십의 기준을 세우는 힘혁신기업의 리더는 자유와 실험만 강조하지 않는다. 조직 전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틀’을 세운다. 최근 카카오와 네이버의 대비된 상황은 이를 잘 보여준다. 카카오는 성장기에 가장 실험적이고 자유로운 문화를 자랑했다. 김범수 의장은 젊은 리더들의 성공욕구를 자극하고, 산하 조직들이 자율적으로 실험하도록 독려했다.그러나 그 성공욕구가 조직 공동체의 성취로 전환되는 구조는 부재했다. 명확한 윤리 기준과 리더십의 공통 규범이 없었고, 각 조직은 개인의 성취에 치우치거나 비윤리적 행동을 견제하기 어려웠다. 자유로움은 통합적 리더십의 부재 속에서 혼란의 씨앗이 됐다.반면 네이버는 실리콘밸리 기업들에 비해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내부 거버넌스와 의사결정 체계를 차근차근 구축했다. 외부에서 다양한 리더를 영입하면서도 네이버의 조직적 바운더리 안에서 움직이도록 했다. 사내독립기업(CIC) 체계 역시 이런 철저한 틀 위에 세워졌다.2015년 도입된 CIC 제도는 성장 가능성이 높은 조직에 자율성을 부여하되, 일정 수준에 이르면 독립시켜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는 모델이다. 네이버웹툰과 네이버파이낸셜이 대표적 성공 사례다. 최근 네이버는 5개의 CIC를 12개로 확대하고, AI 중심의 기술 패러다임 전환에 대응하는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이런 변화는 이전의 성공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네이버만의 조직 방정식을 만들어 가고 있는 사례로 보여진다. 리더의 내면이 조직의 한계다혁신 조직은 자율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리더가 불안하거나 확신이 없으면, 본능적으로 사람과 상황을 통제하게 된다. 이런 통제적 분위기는 빠르게 조직 전반에 전이돼 경직된 문화로 변한다.한 고객사 사례에서 새로 부임한 CEO는 조직을 전면적으로 혁신하고자 했다. 혁신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이해했지만, 조직의 변화는 머리로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단숨에 찾아오지 못했다. CEO는 옳은 방향성을 제시했지만, 구성원과의 정서적 연대와 신뢰를 충분히 구축하지 못한 채 변화를 밀어붙였다.CEO의 의견과 대치되거나 거스르는 의견에 대해 질책이 심해지자 구성원들은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리더는 누구보다 뛰어나기에 리더가 됐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자신과 같은 이해 수준에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방향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면서도, 독단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할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그것을 통해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가 조직 신뢰의 출발점이다.혁신기업은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명확하고 반복적인 방향성의 소통 ▲성과와 문화의 균형 ▲조직의 틀과 기준을 세우는 리더십 ▲리더 자신의 내면 관리라는 네 가지 축이 함께 작동할 때 가능하다. 혁신기업들은 서로 다른 맥락 속에서 이 요소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구현해왔다. 문화에 정답은 없지만, 리더가 이 네 가지 축을 통해 자신만의 방정식을 세울 때 혁신기업은 탄생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 단 한가지만 꼽아달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오랫동안 다양한 기업들의 조직 혁신을 지원해온 경험상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CEO의 끊임없고 일관된 방향성 제시와 꾸준한 추진력이다.혁신은 우연히 ‘아래에서’ 솟아오르지 않는다. 강력한 톱-다운(Top-down) 리더십이 명확한 방향성과 ‘어디로 가야 하는지’(Where to go)를 일관되고 건강한 메시지로 지속적으로 전달하고, 그 뜻을 함께하는 리더십이 조직 내에서 재생산될 때 비로소 건강한 보텀-업(Bottom-up) 문화가 자생적으로 형성된다. 리더는 혁신기업의 방향을 제시할 뿐 아니라, 그 조직을 만들어내는 존재다.

2025.11.08 10:00

7분 소요
‘죽은 인터넷의 사회’가 미치는 파장은?[한세희 테크&라이프]

전문가 칼럼

간혹 소셜 미디어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엄청나게 많은 게시물을 쉬지 않고 쏟아내는 사람을 본다. 하루 종일 모든 글에 댓글을 달며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다. 일상 생활은 가능한지 의심이 들 정도로 활동이 많다. 이런 사람을 볼 때 혹시 사람이 아니라 ‘봇’(bot)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봇이란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자동화된 소프트웨어 로봇을 말한다. 검색 엔진이 인터넷의 정보를 색인하기 위해 웹페이지에 보내 내용을 긁어오게 하는 ‘크롤러’(crawler)가 대표적이다. X (구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에는 예전부터 일정한 주제의 내용을 정기적으로 자동 게재하는 봇 계정이 많이 활동했다. 인터넷 활동에 과몰입한 사람을 봇이라 부르는 건 장난 섞인 비유지만, 우리가 인터넷에서 봇을 접할 확률은 계속 커지고 있다. 봇의 활동이 점점 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AI 모델 학습을 위해 웹에서 콘텐츠를 긁어오는 ‘AI 크롤러’가 늘었다. 아카마이테크놀로지스 조사에 따르면, 최근 1년 사이 AI 봇이 전체 자동화 트래픽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00% 이상 증가했다. 인터넷엔 사람보다 봇이 더 많아 언론사나 콘텐츠 기업 웹페이지에서 긁어온 내용으로 학습한 AI 모델이 이제 사용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즉각 정리해 제공하게 되면서, 검색을 통해 찾아오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기존 콘텐츠 산업의 비즈니스 모델이 무너지는 상황이다. 봇은 전자 상거래 사이트나 여행 사이트에서 쉴 새 없이 상품이나 가격 정보를 확인하기도 한다. 이런 정보를 이용해 가격이나 상품 구성을 조정하고, 심지어 한정판 제품이나 콘서트 티켓을 선점하는 등 반칙 또는 사기에 활용하기도 한다. 정보보호 기업 임퍼바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웹 트래픽에서 인간 활동이 차지하는 비율은 49%로 사상 처음으로 절반 밑으로 내려갔다. 봇의 활동이 전체 트래픽의 51%로 더 많았다. 더구나 온라인 비즈니스를 방해하거나 부당한 이익을 취할 목적으로 운영되는 ‘나쁜 봇’(bad bot)이 37%로 일반적인 ‘착한 봇’(14%)보다 2배 이상 많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리가 인터넷에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상호작용은 사람이 아니라 봇에 의한 것이고, 이미 사람은 인터넷에서 소외된 상태라는 이른바 ‘죽은 인터넷 이론’(Dead Internet Theory)이 새 힘을 얻고 있다. 인터넷은 이미 죽었나? 죽은 인터넷 이론은 2021년경 등장한 음모론이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보는 대부분의 콘텐츠는 AI와 봇이 만든 것이고, 우리가 사람이라 생각하며 대화하는 상대방은 실은 봇이라는 것이다. 인터넷은 이미 황폐한 공간인데, 각 개인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온라인에서 봇과 대화하며 상호작용의 ‘환상’에 빠져 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음모론이긴 하지만, 가볍게 기각하기엔 왠지 그럴듯해 보인다. 요즘 들어선 더욱 그렇다. 최근 생성형 AI의 발전은 실제 사람과 구분하기 어려운 AI 봇이나 가짜 계정의 활용 가능성을 크게 높여주었다. AI가 실제 사람처럼 글 쓰고, 대화하고, 이미지와 영상을 만드는 판에 이들이 인터넷에서 사람 행세를 하고 다닌다 해서 우리가 구분할 수 있을까? 어차피 인터넷에선 랜선 너머 모니터 앞에 앉아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지 않나? 이미 유튜브나 소셜 미디어엔 AI로 쇼츠 영상이나 블로그, 링크드인 콘텐츠 생성을 자동화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성공 인플루언서들의 콘텐츠가 넘쳐난다. 과거엔 소셜 미디어에서 전문적 지식이나 통찰, 흥미로운 최신 동향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게시물을 보며 내공과 감탄을 느꼈다면, 이제는 어느 AI 모델을 써서 짜깁기한 내용일지가 먼저 궁금해진다. 유튜브 쇼츠나 인스타그램 릴스를 넘기며 귀여운 아기나 아름다운 여성이 등장하는 영상을 보다가 문득 이들이 진짜 사람을 촬영한 것인지, 혹은 AI로 정교하게 생성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나 유튜브 크리에이터 영상에 표시된 ‘좋아요‘나 댓글은 진짜 사람이 와서 누르거나 쓴 것일까? 전자상거래 사이트에 붙은 리뷰는? 가짜 계정과 봇을 이용한 ‘좋아요’ 장사나 전용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포털 뉴스 댓글 공작의 전례들을 볼 때, 이러한 활동을 AI를 이용해 보다 고도화하는 시도가 활발할 것이란 점은 쉽게 예측 가능하다. 테크 산업의 거물들도 이런 의문에 뜻을 같이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일런 머스크는 트위터를 인수할 당시 당초 생각보다 ‘봇‘에 의한 트래픽이 크다며, 즉 가치가 고평가됐다며 인수 의사를 번복하기도 했다. 인수 후 X에 봇이 충분히 줄어들지 않았는지, 머스크와 앙숙인 샘 알트만 오픈AI CEO는 최근 AI 봇 확산에 우려를 표하며 “X에 대규모언어모델(LLM)이 운영하는 계정이 정말 많은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세계 최대 인터넷 커뮤니티 레딧 창업자 알렉시스 오헤니언도 “인터넷의 상당 부분은 이제 그냥 죽었다”고 말했다. AI가 만드는 멋진 신세계 AI 기술 확산과 함께 이런 추세는 더 강해질 것이다. 구글은 실제와 구분하기 어려운 영상을 만드는 ‘나노 바나나’ 모델을 이미 ‘제미나이’에 적용했다. 아마존은 상품 설명과 리뷰를 AI로 자동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메타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왓츠앱 등에 AI를 적용해 글이나 이미지를 생성할 수 있도록 했다. 향후 메타가 원하는 가상현실 기반 ‘메타버스’가 현실화된다면, 그 세계에서 나의 아바타가 만나는 다른 아바타들의 뒤엔 과연 실제 사람이 있을까? 모두가 아바타인 가상 세계 안에서 사람과 AI가 아무 구분 없이 섞여 지낸다 한들 특별히 어색하진 않을 듯하다. 더구나 AI는 더욱 설득력 있는 알고리즘으로 우리를 플랫폼에 붙잡아 둘 수 있다. 나에 맞춰 초개인화된 AI 페르소나를 가장 적절할 때 노출하는 AI 알고리즘을 상상해 본다. 플랫폼 기업의 이해관계에 맞춘 알고리즘의 물결에 단지 떠밀려 다닌다면, 확실히 인터넷은 죽은 곳이 될 터다.

2025.11.08 06:00

4분 소요
동남아시아 핀테크 열기, 그 근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동남아시아 투자 나침반]

전문가 칼럼

동남아시아의 핀테크 시장은 지금, 뜨겁다는 표현이 모자랄 정도로 활기를 띠고 있다.2025년 상반기 동남아시아에서 새롭게 유니콘 기업이 된 3개(시그넘(Sygnum), 튠즈(Thunes), 아쉬타(Ashita))중 시그넘과 튠즈가 핀테크 기업이다. 2024년 유일하게 유니콘이 된 타임그룹(tyme group) 역시 디지털 은행이다. 같은 기간 핀테크 스타트업들이 전체의 절반 이상 투자를 받았다. 이는 단순히 한 섹터의 성장세가 아니라, 자본의 선택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2025년 상반기 동남아 스타트업 투자 흐름을 보면, 다른 분야에 비해 압도적인 투자를 받았다.동남아시아에서는 모바일 결제, 디지털 뱅킹, 국경간 송금, P2P 대출, 보험·투자 플랫폼이 폭발적으로 성장 중이다. 겉으로 보면 자본과 기술이 몰려든 결과 같지만, 그 밑바탕에는 금융포용(financial inclusion)의 공백이 있다. 전통 금융망이 닿지 않았던 지역, 즉 은행 계좌가 없거나 신용이력조차 없는 인구가 여전히 절반에 달하는 현실이 디지털 혁신의 실험장이 된 것이다.그럼 이 성장의 구조적 요인을 단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이 폭발의 또 다른 동력은 인구구조다. 동남아의 중위연령은 30세 안팎, 하루 평균 스마트폰 사용 시간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젊은 세대는 현금보다 QR코드, 지점 방문보다 모바일앱에 익숙하다.이들에게 금융은 ‘플랫폼의 기능 중 하나’일 뿐이다. 배달앱에서 결제를 하고, 모빌리티 앱에서 소액대출을 받으며, 커머스 플랫폼에서 보험을 드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생활 속 금융이 스며들었다. 금융은 이제 서비스의 끝단이 아니라 생활 습관의 인터페이스가 된 셈이다. 핀테크 성장의 또 다른 배경은 각국 정부가 펼친 규제완화와 테스트베드 정책이다.싱가포르의 MAS(통화청)는 세계 최초로 디지털은행 라이선스를 도입했고, 인도네시아는 큐리스(QRIS)라는 통합결제체계를 통해 핀테크 결제 시장의 폭발적 확대를 이끌었다. 말레이시아와 필리핀도 규제 샌드박스를 운영하며 혁신금융 실험을 제도권 안에서 보호했다.이러한 통제된 실험은 투자자에게 정책 신뢰를, 스타트업에게는 성장의 안전지대를 제공했다. 정부 주도의 정책 실험이 시장의 신뢰를 만들고, 신뢰가 다시 투자로 이어지는 순환이 형성된 것이다.하지만 핀테크로의 투자 몰림 현상에는 다른 원인도 있다.동남아시아에서 인공지능(AI), 로보틱스, 반도체 등 딥테크 분야에 대한 투자가 상대적으로 위축되면서, 단기 수익이 빠르게 확인되는 소비자 금융형 모델에 자금이 몰리는 것이다. 결국 이 현상은 기술의 질적 심화보다, 자본의 효율적 회수를 중시하는 속도 중심의 투자 생태계를 드러낸다.그러나 단기적 열기가 장기적 경쟁력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AI·데이터 분석 등 딥테크 기술이 핀테크에 융합되는 2차 성장 단계(Second Wave)가 필수적이다.예컨대, 인도네시아의 고젝(GoTo)은 이미 AI 기반 신용평가 알고리즘을 도입하고 있으며, 싱가포르의 그랩(Grab)은 머신러닝을 활용해 이용자 행동 데이터를 바탕으로 맞춤형 금융상품을 제시한다. 기술이 금융의 효율성과 신뢰성을 함께 끌어올리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국 기업, 결합형 파트너십에서 기회 찾아야 이런 맥락에서 한국 기업의 역할은 단순한 시장 진출을 넘어 기술 결합형 파트너십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첫째, AI·데이터 분석 기술을 현지 금융 인프라에 접목해 ‘핀테크의 고도화’를 이끄는 모델이 유효하다. 예를 들어 한국이 강점을 가진 신용평가·리스크 관리·보안 솔루션은 동남아 금융당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기술 분야다.둘째, 싱가포르·말레이시아 등에서 운영 중인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활용해 초기 실증사업(Pilot Project)을 추진함으로써, 금융과 기술이 결합된 레퍼런스를 확보할 수 있다.셋째, 핀테크 기업 간 협업을 통한 국경 간 결제(cross-border payments) 플랫폼 구축 역시 유망하다. 동남아 각국이 추진 중인 통합결제망(QRIS·PromptPay 등)은 한국의 기술과 결합할 때 안정성과 범용성을 높일 수 있다.결국 한국 기업이 동남아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단기적인 시장 점유율보다 신뢰 가능한 기술 파트너로 자리 잡는 것이 핵심이다.균형의 기로에 서 있는 동남아 핀테크 시장 지금 동남아시아의 핀테크는 성장의 정점이 아니라 균형의 기로에 서 있다. 빠른 자본 회전이 가능하다는 장점 뒤에는, 기술 심화의 정체라는 리스크가 공존한다. 핀테크가 지속가능한 혁신으로 진화하려면, 단순한 금융 접근성 확대를 넘어 AI·데이터·보안 등 딥테크와의 융합이 필수적이다.자본은 속도를 원하지만, 기술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 두 축을 연결하는 전략적 균형을 설계할 수 있다면, 동남아시아의 핀테크 열기는 단순한 거품이 아니라 새로운 금융 패러다임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국 기업이 제공할 수 있는 기술력과 경험은, 동남아시아의 ‘빠른 성장’에 깊이를 더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2025.11.0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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