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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톡에서 시작된 ‘맘다니’ 혁명[허태윤의 브랜드 스토리]

전문가 칼럼

2025년 11월 4일, 미국 정치사에 한 획이 그어졌다. 인도계 우간다 태생의 91년생(34세) 무슬림 사회주의자 청년이 뉴욕시장에 당선된 것이다. 조란 맘다니(Zohran Mamdani). 100년 만의 최연소 시장이자 첫 무슬림 시장. 더 놀라운 건 그가 정치 왕조의 후계자 앤드루 쿠오모를 꺾었다는 사실이다.물론 그의 진보적 정책 - 임대료 동결, 무료 대중교통, 시영 식료품점 - 에 대해선 찬반이 갈릴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건 그의 정치 성향이 아니다. 보수든 진보든, 정치든 비즈니스든, 새로운 세대와 소통하려는 모든 이들이 참고해야 할 혁신적 브랜딩 전략이다. 어떻게 2월 지지율 1%의 무명 정치인이 6월엔 32%, 11월엔 시장 당선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는 정치를 하지 않았다.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었다.알고리즘 해킹: 정치광고가 아닌 콘텐츠를 만들다기성 정치인들이 TV 광고에 수백만 달러를 쏟아부을 때, 람다니는 93초짜리 동영상 으로 승부를 봤다. 뉴욕 길거리 상인과 대화하며 노점상 허가증 가격(2만 2000달러!)을 폭로한 영상은 순식간에 300만 뷰를 돌파했다.비결은 '광고'가 아닌 '콘텐츠'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Subway Takes’라는 틱톡 시리즈에선 지하철에서 지하철카드를 마이크 삼아 시장 출마를 선언했다. 100만 팔로워를 보유한 이 채널과의 협업으로 만든 영상은 57만 5000개의 '좋아요'를 받았다. 출구조사가 증명한다. 18-29세 투표자의 78%가 그를 선택했다. 쿠오모가 천문학적 자금으로 만든 광고들은 MZ세대의 알고리즘을 뚫지 못했다. 반면 람다니의 콘텐츠는 댓글과 공유, 듀엣과 스티치를 통해 자생적으로 퍼져나갔다."Hot Girls for Zohran." 흥미롭게도 이 캠페인은 람다니가 만든 게 아니었다. 브루클린에 사는 두 친구가 자발적으로 시작한 운동이었다. 2020년 버니 샌더스를 지지했던 #HotGirlsForBernie에서 영감을 받은 이들은 람다니의 정책에 감명을 받아 재미있는 캠페인 티셔츠를 만들어보자"는 단순한 아이디어로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람다니의 진짜 전략이 드러난다. 그는 이런 자발적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었다. 최저임금 30달러, 시영 식료품점, 무료 대중교통 같은 급진적이지만 구체적인 정책들. 이는 뉴욕의 진보적 인플루언서들의 신념과 정확히 일치했다. 슈퍼모델 에밀리 라타이코프스키가 동참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2020년 버니 샌더스를 지지했던 진보 성향의 인플루언서였다. 280만 틱톡 팔로워를 보유한 그녀는 단순히 "지지한다"고 선언한 게 아니라, 직접 티셔츠를 입고 거리에 나섰다. 선거일 아침, 람다니와 함께 찍은 셀피 스타일 영상에서 "이번 선거는 젊은 유권자가 결정할 것"이라며 투표를 독려했다.가수 로드, 배우 신시아 닉슨, 감독 에이바 듀버네이, 배우 마크 러팔로... 이들 모두가 자발적으로 콘텐츠를 만들고 전화 캠페인에 참여했다. 심지어 배우겸감독 소피아 코폴라(프란시스코폴라의 딸)가 람다니에게 투표하는 영상까지 나왔다.결과는 어땟을까? 1만 8000명 이상의 팔로워, 5만 명의 자원봉사자, 150만 개의 현관문을 두드린 캔버싱. 이는 '동원'이 아닌 '참여'였고, '지지자'가 아닌 '공동창작자'였다.하이퍼로컬 전략: 10개 언어로 말하는 후보브루클린 선셋파크에선 중국어로, 퀸스 잭슨하이츠에선 벵골어로, 브롱스에선 스페인어로. 람다니 캠프는 10개 이상의 언어로 유권자와 소통했다. 단순 번역이 아니었다. 각 커뮤니티의 문화적 맥락에 맞춰 메시지를 재창조했다. 특히 주목할 건 그가 직접 힌디어로 순위선택투표제를 설명하는 영상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남아시아 팝컬처 레퍼런스까지 곁들인 이 영상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문화적 유대감을 형성했다.벵골계 청년들은 세대 간 타운홀 미팅을 열어 복잡한 정책을 쉽게 설명했다. 장애인 권익 단체는 수어로 캠페인 영상을 제작했다. 'Deafies for Zohran'(조란을 돕는 청각장애자들) 같은 그룹들은 각자의 커뮤니티에서 자율적으로 활동했다.기성 정치인들의 '표 계산용' 다문화 행사와는 차원이 달랐다. 람다니는 각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어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방식으로 소통했다. 브롱스 킹스브리지에서 2% 열세가 14% 우세로 뒤집힌 비결이다.선거자금이 800만 달러 상한선에 도달하자 람다니는 "더 이상 기부하지 마세요. 대신 자원봉사를 해주세요."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정치 컨설턴트들은 경악했다. 하지만 이 한 마디가 그의 브랜드를 완성했다. 쿠오모가 슈퍼팩 자금 5500만 달러를 쏟아부을 때, 람다니는 소액 기부로 모은 800만 달러로 승부했다. 투명하고 솔직한 소통은 그 자체로 강력한 메시지가 됐다.더 놀라운 건 그가 자신을 '미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GQ와 인터뷰 매거진 화보를 찍으면서도 "실패한 래퍼"라는 과거를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불완전함이 그를 더 '진짜'로 만들었다.정치를 넘어, 브랜딩의 미래를 보다람다니 현상이 브랜드 마케터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첫째, 인플루언서를 '활용'하려 하지 말고 그들이 '참여'하고 싶은 운동을 만들어라. 둘째, 완벽한 이미지보다 불완전하지만 진짜인 스토리가 강하다. 셋째, 플랫폼의 언어를 구사하되 본질을 잃지 마라. 넷째, 타깃을 관객이 아닌 공동창작자로 대하라.무엇보다 람다니는 '참여의 아키텍처'를 구축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브랜드를 '소비'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함께 만들기'를 원한다. 이것이 알고리즘 시대, MZ세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브랜드 문법이다.'West Village Girl'(뉴욕웨스트빌리지의럭셔리한 삶을 영위하는 젊은 여성) 현상이 보여주듯, 오늘날 젊은이들은 미니 크루아상을 사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선다. 단순히 제품을 사는 게 아니라 그 경험을 공유하고, 소속감을 느끼며,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람다니는 이런 문화적 코드를 정치에 접목시켰다.100년 만의 최연소 뉴욕시장. 그의 당선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다. 브랜드가 만들어지는 방식, 메시지가 전파되는 경로, 팬덤이 형성되는 과정의 패러다임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2026년 한국 지방선거를 앞둔 지금, 람다니 현상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수막과 명함, 악수와 인사가 전부였던 선거판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미 일부 젊은 정치인들은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서 새로운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하지만 중요한 건 단순히 '젊은 플랫폼'을 쓰는 게 아니다. 람다니가 보여준 것처럼, 시민을 동원의 대상이 아닌 참여의 주체로, 유권자를 관객이 아닌 공동창작자로 보는 근본적인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한국에도 '한국의 람다니'가 나타날까? 구태의연한 정치 문법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세대의 언어로 소통하며, 진정성 있는 비전으로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정치인 말이다. 2025년 11월 4일은 정치가 브랜딩을 만난 날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묻게 될 것이다. "당신의 브랜드는 람다니 이전입니까, 이후입니까?"

2025.11.16 06:00

4분 소요
세계 1위 전자정부’의 화재, 기술보다 시스템이 타버렸다 [이근면의 시사라떼]

전문가 칼럼

AI의 시대. 화제가 만발이다. 세계 AI 3대 강국. AI 중심국가. 거기에다 엔비디아가 GPU 20만 장을 한국민에게 선물한다는 빅뉴스까지. 젠슨 황, 이재용, 정의선의 깐부 회동이 뒷이야기를 퍼나른다. 이야! 멋진 AI의 나라이다. 그런데 ‘세계 최고의 전자정부’라는 타이틀이 무색해졌다. 국가 주요 시스템이 화재로 전면 중단되고 백업 데이터조차 확보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났다.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국가 운영의 근간이 무너진 사건이다. 한때 디지털 선진국이라 자부했던 대한민국이 왜 이런 기본적 실패를 반복하는가.국가 정부 운영 시스템과 데이터 관리는 AI 시대 속도를 전혀 따라가지 못한 것이 근본 원인이다. 세계와 민간 기업은 이미 글로벌 AI 전쟁 시대에 돌입했는데 국민의 자산과 미래는 방치된 것이다. 사건의 본질은 기술보다 운영 시스템의 구조적 부실에 있다. IT는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지만, 정부 시스템은 전략적 영속성이 부재한다. 책임은 분산되고 전문성은 사라진다. 시스템은 남아 있지만 ‘이해하는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정권 따라 바뀌는 담당자…전문성 부재가 불러온 참사결국 정권에 따라서 바뀌는 것은 물론 정책도, 책임자도, 관리자도, 담당자도, 실제 오퍼레이션 하는 민간 기업도 2~3년 주기로 바뀐다. (정부 조달 정책?) 모두가 현재만이 존재한다. 과거 히스토리도, 미래 전략적 꿈도 없는 조직과 기관이 되어 버렸다. 별일 다 하고 크기도 엄청난 행정안전부의 1개 부서가 맡을 일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있다’와 ‘된다’를 혼동하는 관행이다. 백업이 있다고 해서 복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주기적 점검, 무결성 검증, 복구 리허설이 없다면 백업은 그저 종이 위의 문서일 뿐이다. 이번 사태는 서류상으론 완벽했던 시스템이 실제로는 복구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다.이제는 공공 IT를 행정 편제의 일부가 아니라 국가 안보 인프라로 인식해야 한다. 세금, 행정, 국정 데이터가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행정 공백이 아니라 국가 기능의 정지다. 대응의 핵심은 ‘누가 맡을 것인가’의 문제가 아닌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다. 지금의 순환보직 체계로는 AI 시대의 복잡한 기술 환경에 대응할 수 없다. 반대로 모든 것을 민간에 위탁하는 것도 위험하다. 정부의 설계권이 사라지고 특정 업체에 종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공무원 특수전문직화’와 민간 전문역량의 상시 결합’이다. 정부 인력 운영 체계의 전근대성이 ‘사고의 재발과 비전문가 집단’의 상시 시한폭탄의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데이터 아키텍처, 복구 전략, 보안 기준 등 ‘설계와 책임’을 쥐고, 민간은 기술과 운영을 맡는 구조다. 이를 위해 정부 내에 장기근속이 가능한 디지털 전문직 트랙을 신설해야 한다. 명예직 공무원이 아닌 SRE(Site Reliability Engineer), 보안 아키텍트, 백업 엔지니어 같은 기술 실무 중심의 직군을 제도화해야 한다. 군조차도 각기 세부화된 병과와 직종이 기본이다. 정부 내에는 ‘국가디지털·레질리언스본부(가칭)’를 만들어야 한다. 이 본부는 각 부처의 IT 업무와 재난·화재·랜섬웨어 등 모든 복구 시나리오를 통합 관리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한다. 단순한 정보관리원이 아니라 복구와 지속성의 책임기관이어야 한다. 민간 IT 전문 회사의 기능과 역량을 따라갈 수준의 국가 CIO와 그 전략 운영 기관의 전문성이 국가 생존 전략이다. 기술적으로는 ‘3-2-1-1-0’ 원칙을 의무화해야 한다. 조선의 5대사고, 삼성의 멀티 데이터 센터의 운영은 왜 있었을까? 데이터를 세 개 이상 복제하고 두 가지 매체에 저장하며, 한 곳은 오프사이트(외부), 또 다른 한 곳은 오프라인·불변(immutable) 형태로 보관해 무결성을 보장해야 한다. 여기에 백업의 오류가 0이라는 뜻의 ‘제로 에러 정책’을 병행해야 한다. 이런 체계는 관리의 문화와 예산의 철학이 바뀌어야 가능하다. 장비를 사는 데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훈련과 점검, 복구 시뮬레이션에 예산을 써야 한다. 책임 없는 행정이 신뢰 무너뜨려 법적 장치도 필요하다. 총체적 AI 중심 국가를 가능하게 할 기반 구조의 철저화가 병행 되어야 한다. ‘공공디지털인프라 안정·복구법(가칭)’을 제정해 RPO(복구시점목표)와 RTO(복구시간목표)를 법으로 명시하고 모든 공공시스템이 매년 복구 리허설을 실시하도록 해야 한다. 검사기관은 문서상 점검이 아니라 실제 복구 시연을 통해 점검해야 한다. 민간 기업에도 이런 기준을 적용해야 국가 전체의 사이버 레질리언스가 올라간다. 통신회사들의 개인정보 누출 사고와 해킹 피해에 대해 은폐 의혹이 끊이지 않는 사례는 요즘 다반사다. 궁극적으로는 ‘블레임리스(무탓) 사고분석 문화’가 필요하다. 실패를 숨기거나 덮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인 포스트모템을 통해 원인과 개선책을 공유해야 한다. 투명한 보고와 학습이야말로 신뢰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다.이번 사고는 ‘최신 기술’의 실패가 아닌 낡은 제도와 책임 없는 행정 구조의 실패다. 시대와 기술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던 정치와 행정의 ‘합작 사고’이다. 우주를 나는 시대에 기술을 보는 눈은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화재가 발생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아직도 복구 중이다. 이 초AI시대에 넌센스의 한 장면이다. 디지털정부는 장비가 아니라 사람과 조직이 만든다. 국가가 진정한 의미의 디지털 선진국으로 남고자 한다면 정권 차원까지를 넘어서고 순환보직을 넘어서는 ‘특별한 인력 운영 시스템’을 준비해야 한다.세계 1위 전자정부의 명성은 한 번의 화재로 무너졌지만 진짜 위기는 복구가 아니라 변화에 대한 의지의 부재다. 이제는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과 제도를 백업해야 할 때다. 부국강병보다 내 편의 이익이 먼저인 듯한 정치의 어두운 그림자는 걷어내고 모든 국민이 양지를 찾아낼 지혜가 절박하다. 그때 비로소 대한민국은 다시 ‘신뢰할 수 있는 디지털국가’로 일어설 수 있다.

2025.11.15 10:01

4분 소요
‘명품’은 왜 명품이라 불리는가 [이윤정의 언베일]

전문가 칼럼

“럭셔리 브랜드의 인기와 명성이 예전만 못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늘었다. 럭셔리 브랜드와 일반적인 브랜드의 차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의견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고액 자산가를 제외하고는 경기 침체 등으로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중시하는 소비 패턴이 강해지고, 정보를 다량 보유한 소비자의 안목이 높아진 점도 한 몫을 한다. 흔히 럭셔리 브랜드를 ‘명품’(名品)이라고 부르지만, 모든 럭셔리 브랜드가 명품의 자질을 갖춘 것은 아니다. 해외에서 수입된 고가의 제품을 통칭하는 용어가 필요하다면 럭셔리 브랜드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럭셔리 브랜드’와 ‘명품’의 차이 대다수 럭셔리 브랜드는 가격이 높은 편이다. 이유는 다양하다. 기본적으로 ▲탁월한 ‘품질’ ▲짧게는 50년, 길게는 100년 이상 지속된 ‘디자인’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장인 정신’ ▲역사와 유산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 등을 포함해 브랜드의 신뢰도와 이미지를 쌓아왔기 때문이다. 높은 가격은 긴 세월 동안 쌓아온 브랜드의 명성에 품질이 더해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럭셔리 제품 중에서도 명품의 자격은 무엇일까.앞서 언급한 조건에 ‘희소성’을 추가하고 싶다. 럭셔리 브랜드의 제품 중에는 처음부터 아예 하나 밖에 만들지 않는 제품도 있다. 요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하이 주얼리’가 대표적이다. 하이 주얼리는 원석이 주인공인 만큼 태생부터 여러 버전을 만들기 어렵다. 진귀한 원석을 찾으면 그에 맞춰 디자인을 하기 때문에 매년 나오는 하이 주얼리 컬렉션의 모든 제품은 한 점씩만 제작된다. 샤넬이나 디올 등 패션 브랜드에서 간헐적으로 선보이는 ‘오트 쿠튀르’(최상급의 맞춤 의상)도 마찬가지다. 제작 과정이 거의 사람의 손으로 이뤄지며, 한 디자인에 한 벌 정도만 만든다. 각 브랜드가 소개하는 ‘리미티드 에디션’은 희귀함을 추구하는 럭셔리 브랜드의 정체성이 잘 나타난 결과다. 유명세를 얻어 잘 팔리던 제품이 어느 순간 희소성을 잃게 돼 인기가 떨어지는 점도 럭셔리 브랜드의 속성을 잘 나타낸다. 시계 이상의 예술품 '라 꿰뜨 뒤 떵'또 하나의 요소를 추가한다면 ‘예술성’을 꼽고 싶다. 예술성은 특정 기준으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예술 작품처럼 만들어진 상품을 만나면 명품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일상에서도 사용 가능하지만, 브랜드가 보유한 창작성을 마음껏 표현하는 데 방점을 찍은 제품이다.최근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바쉐론 콘스탄틴(Vacheron Constatin)과 루브르 박물관의 파트너십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시가 개최됐다. 지난 12일까지 열린 ‘기계의 예술’(Mecaniques d’Art)이다. 이 전시에 소개된 ‘라 꿰뜨 뒤 떵’(La Quete du Temps·시간의 탐구)은 감히 예술품이라 부를 만하다. 수백 년을 이어온 스위스 시계 제작 노하우와 공예 기법이 조화를 이룬 시계에 사람의 움직임을 정교하게 구현한 기계 장치인 ‘오토마통’(automaton)을 결합했다. 시계는 ▲상단의 돔 안에 자리한 오토마통 ▲중간의 시계 부분 ▲하단의 음악 장치 등으로 구성됐다. 무려 7년 간의 개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시계는 6293개의 기계식 부품(시계를 위한 2370개 포함)과 외관을 위한 1020개의 부품 등이 결합한 작품이다. ▲오토마통이 구현하는 144개의 움직임 ▲오토마통에 내장된 158개의 캠 ▲8개의 오토마통 관련 특허 출원 등 마치 ‘신기록 제조기’ 같은 스펙도 갖췄다. 압도적인 규모와 존재감을 자랑하는 ‘라 꿰뜨 뒤 떵’은 높이 1m가 넘는 작품으로 시계를 넘어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경이로운 창작물에 가깝다. ‘손의 힘’ 가치 전한 보테가 베네타전(展)럭셔리 브랜드에서 ‘사람의 손 맛’은 필수적이다. 올해 여름 서울에서 전시를 연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의 ‘세계를 엮다: 인트레치아토의 언어’ 전시는 다시 한 번 손의 힘을 느끼게 해줬다. 보테가 베네타의 인트레치아토 탄생 50주년을 기념한 전시에서는 ‘엮임’이라는 주제로 한국 작가와의 협업 작품을 선보였다. ‘브릭 아 브락’(Bric a Brac) 시리즈 중 다섯 가지 디자인의 창작품도 전시했다. 브릭 아 브락은 이탈리아 북동부 베네토 지역의 보테가 베네타 아틀리에에서 사용하고 남은 가죽 조각을 엮어 완성한 특별한 창작물이다. 각 크리에이션은 브랜드의 시그니처인 ‘인트레치아토’(얇은 스트랩 모양의 가죽을 패널이나 나무 몰드를 따라 손으로 정교하게 엮어 완성하는 기법)로 완성됐다. 다양한 형태와 움직임을 보여주며 진화된 수공예의 표현력을 증명한다. 마치 뜨개질을 하듯 가죽을 자유자재로 엮어 표현한 5개의 작품은 단순한 핸드백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장인이 수십 시간, 혹은 수백 시간을 들여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손으로 제작한 하이엔드 시계와 하이 주얼리도 명품이라 부를 수 있다. 제품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정성과 시간은 대중적인 브랜드에서는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명품은 ▲고유의 디자인 ▲품질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변화 등을 장착한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나열한 몇 가지 요소를 갖춘 제품이나 브랜드를 만났을 때 럭셔리 브랜드는 과시의 대상이 아닌 잘 만들어진 아름다운 작품을 소유하는 기쁨을 제공한다.

2025.11.15 09:30

4분 소요
'너도나도 출렁다리' 만들기…행정은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나 [스페셜리스트 뷰]

전문가 칼럼

많은 시민들은 정부·지방자치단체·공공기관(이하 국가)이 사회 전체의 부를 지키고 늘려주며, 나의 안전과 이익을 지켜주리라는 막연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국가가 이러한 믿음에 반하는 정책을 종종 취해왔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공공 목적의 사업을 한다며 시민의 사유재산인 토지를 강제수용하는 등의 사례들 처럼 말이다. 그로 인해 피해를 입어온 시민들이 있다는 사실 또한 막연히 느끼고 있으며, 그 대상이 자신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는 한다.추상적인 존재로서의 국가가 사회와 시민 개개인을 지킨다는 것은, 그 사회를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대전제다. 하지만 특히 한국이라는 국가는 주변의 적국들로부터 국가의 존속을 지킨다는 존재 목적을 우선시했으며, 시민 개개인의 안전과 이익을 지키는 것은 제1순위 목적이 아니었다. 심지어 국가의 존속을 지킨다는 목적으로 시민 개개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목숨까지 빼앗는 일도 숱하게 일어났다. 1980년 5월 18일에 광주에서 있었던 국가 폭력은 그 중 가장 심각한 사례로 꼽힌다.나아가, 국가 또한 개개인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집합체이다 보니, 국가를 구성하는 조직원 개개인의 판단과 이해관계를 우선시해 조직 바깥에 존재하는 시민들에게 피해를 입힌 경우도 일어났다. 특정 공무원들이 자신의 임기 중 실적을 올리기 위해 시민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순환배치돼 다른 보직으로 간 뒤에는 모른 척 하는 경우를,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직원을 상대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봤을 터다.이처럼 국가에 의해 사회와 시민 개개인이 피해를 입는 구조가 100여 년간 이어지다 보니, 시민들은 국가가 추진하는 사업에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이다. 이로 인해 국가가 선의의 목적으로 추진하는 사업까지도 시민들의 반대 때문에 추진되지 못해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가 피해를 입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국가나 언론에서는 시민들의 이러한 행동을 ‘민원’이라 부르며 비판한다. 하지만 지난 100여 년간 한국에서 일어난 상황을 돌이켜보건대, 이 악순환의 시작은 시민이 아닌 국가(조선왕조·조선총독부·한국정부)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이 글에서는 국가가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이 피해를 입은 경우를 ‘행정 실패’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과거의 몇몇 행정 실패 사례를 되짚어봄으로써, 앞으로 행정 실패를 줄일 수 있는 힌트를 독자분들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시민 이주’는 가장 최악의 행정 실패다가장 심각한 행정 실패 사례는, 각종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이나 택지 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에 걸쳐 시민들을 이주시키는 경우다.극단적인 경우로는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의 시민들이 겪은 세 번의 강제 이주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42년에 일본군이 비행장을 건설할 때 한 번, 1952년 미군이 이곳에 주둔할 때 두 번째, 그리고 한국 내의 미군 재배치 사업이 이루어진 2006년에 세 번째로 강제이주를 당했다.이 경우는 일본 제국주의와 미국 정부, 그리고 한국 정부까지 얽혀 수 십년에 걸쳐 시민들이 피해를 입은 극단적인 사례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정부에만 책임을 돌리기는 막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음에 소개하는 두 가지 사례는 충분히 예측가능한 행정을 펼칠 수 있었던 경우다.2023년, 대규모 삼성전자 공단이 있는 평택의 남쪽 지역인 지제동에 미니신도시를 개발한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다. 신도시 개발을 위해서는 기존에 살던 주민들을 이주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이들 주민 가운데는 앞서 소개한 미군 기지 재배치 사업과 관련해 2004년부터 시작된 고덕신도시 조성 사업 때 토지를 수용당해 이곳에 옮겨와 살게 된 경우가 있었다.아직 고덕신도시도 개발이 완료되지 않은 상황이니만큼, 정부는 이렇게 두 번의 이주를 강제당하는 시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섬세한 행정을 취할 수도 있었다. 1970년대 초 울산에 고리 원자력발전소가 지어질 때, 사업 대상지역 주민들은 이웃 마을로 이주했다. 그런데 2001년에 신고리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기로 정해지면서, 그 마을이 또 다시 사업 대상 부지로 정해졌다. 정부가 원전 건설을 진행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처음부터 원전 건설 부지를 넓게 설정했다면 이렇게 시민들이 두 번 이주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평택 고덕·지제 신도시나 고리·신고리 원자력발전소 건설 사례는 명백한 한국 정부의 행정 실패 사례다.두 번째로 살펴볼 행정 실패 사례는, 정치·행정 내부 논리로부터 비롯되는 낭비다. 특정 정치인·행정가가 사업을 추진했다가, 선거나 인사 발령을 통해 사람이 바뀌고 나면 앞선 사람이 추진했던 사업을 취소하는 경우다.전라남도 장성군에서는 민선 6~7기 군수가 지역의 색깔을 노란색으로 통일한다는 명목으로 공무원들에게 주택 색깔의 변경을 주장하다가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인권 침해 판단을 받았다. 이후 지자체장이 바뀌면서 도시브랜드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새로운 네이밍을 선정했다가 무산된 상황이다. 충청북도 증평군에서도 전임 군수가 내세웠던 ‘증가포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현재는 듣기 어렵다. 싱가포르 같은 강소도시가 되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괜찮은 캐치프레이즈였어서 아쉬움이 든다.이화동 벽화를 주민들이 직접 지운 사연한편, 전임 지자체장이 특정 건물을 보존하기로 했다가 후임 지자체장이 이를 취소하고 철거하는 사례도 많다. 이 때는 안전진단 등급이 낮게 나왔다거나, 시민들이 주차장을 원한다는 논리가 단골로 등장한다. 강원도 원주시에서는 역사가 오래된 단관극장인 아카데미극장 건물의 보존을 전임 시장이 추진했으나, 신임 시장이 이 정책을 변경하면서 극장 건물이 철거됐다.또 서울에서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전임 시장 시절 추진했던 종로구 창신동 재개발을 재추진하고 있다. 창신동은 도시재생사업의 모범사례로 거론되는 곳이다. 이곳은 한양성곽에 붙어있는 고지대여서,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어렵다 보니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세금이 많이 투입됐는데, 현재와 같이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면 결과적으로 그간 투입된 세금이 헛되이 쓰인 것이 된다. 세 번째 행정 실패는 현직 지자체장이나 공무원이 관광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자기가 관할하는 지역에 관광객이 더 많이 오게 만들겠다면서 다른 지자체의 성공사례를 베끼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그 지역만의 특성이 사라져버리고, 또 그곳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바람에 시민들이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울 대학로 근처, 한양성곽 옆에 자리한 이화동에 벽화마을이 조성됐다가 사라진 경우다. 당시 낙후된 지역에 벽화를 그리면 관광객이 찾아오고, 그러면 지역이 활성화된다는 논리에서 골목마다 천사 날개가 그려졌었다. 하지만 현지 주민들이 아닌 외지 자본이 가게를 열어서 이익을 얻고, 외지인들이 골목 구석구석까지 들어오는 바람에 지역 주민들은 사생활 침해까지 당했다. 그 결과 지역 주민들이 벽화를 지워버린 것이다.광주 양림동이나 부산 이송도마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돼 결국 원주민이 밀려나고 외지인이 지역을 점령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인천 배다리에서는 지자체가 지역 활성화를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하자, 외지 자본이 건물을 매입하고 임대료 인상을 요구하는 바람에 기존 업체들이 위기감을 호소하기도 했다. 정부 구성원들이 무책임하게 행정을 추진한 바람에, 기존 시민들이 생존의 위협을 겪고 결국 밀려난 이런 사례들을 전국에서 쉽게 접한다.시민들, 지자체 행정 소식에 더 관심 기울여야최근에는 천사 날개 벽화에 이어 출렁다리가 전국 지자체에서 유행이다. 몇 년 전에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을 방문했을 때 수도권전철 3호선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양 옆 광고판에 지자체 두 곳의 출렁다리 홍보 광고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출렁다리는 전국에 한 두 곳 지어졌을 때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고 신기해하지, 이렇게 국내 전 지역에 대거 들어서면 더 이상 관광자원으로서 기능하지 못할 수 있다. 또 출렁다리를 만든다고 세금을 들인만큼의 관광 유발 효과가 일어난다는 보장도 없다. 강원도 원주의 간현관광지는 국내 최대 규모의 출렁다리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2023년 말 시점으로 누적 적자 7억원을 기록했다.특정 사업을 추진한 직후에는 반짝 효과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그 사업을 추진한 관계자는 좋은 평가를 받아 선거에서 재선되거나 좋은 보직으로 옮겨가게 된다. 하지만 그 사업이 장기화되면서 반짝 효과가 끝나고 결과가 나쁘게 드러났을 때, 해당 관계자는 이미 그 자리에 없고 책임도 지려 하지 않는다. 또 전임자의 행정이 좋은 결과를 낳았을 경우에도, 후임자는 전임자의 사업을 이어받기보다는 이를 폐기하고 자신의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려는 경향이 있다.행정 실패를 막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자기 지역의 행정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장기적으로 그 결과를 추적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각자의 생업에 바쁜 시민들이 국가의 행정 실패를 추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낸 세금을 정부가 낭비하고 그 결과 내가 피해를 보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좀 더 깨어있고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야 정부 구성원들이 시민을 무서워하고 시민의 눈치를 보며 행정을 펼치게 될 것이다.김시덕 도시문헌학자

2025.11.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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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도난사건'으로 본 그들이 '예술품'을 훔치는 이유 [백세희의 컬처&로(LAW)]

전문가 칼럼

지난달 19일 세상을 놀라게 한 절도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도난 사건이다. 프랑스 왕가의 귀중한 보석 8점이 도난당했다. 나폴레옹과 나폴레옹 3세 부인 외제니 황후의 왕관·목걸이·브로치 등 1460억원 이상의 가치를 갖는 유물들이 사라졌다. 그야말로 세기의 절도 사건이다.절도 사건 이후 세계 57개 박물관장들은 ‘모든 기관은 도난 위협을 받는다’며 루브르를 응원하는 연대의 뜻을 보냈다. 또 루브르 도난 나흘 전에는 미국의 한 박물관에서도 소장품 1000점을 도둑맞은 소식이 뒤늦게 전해지는 등 예술품 도난에 대한 관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번 루브르 사건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박물관(미술관) 절도 사건은 종종 발생해 왔다. 다만 절도한 작품이 너무나도 유명한 탓에 현금화하는 과정에서 곧바로 들통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유명한 예술품은 도데체 왜 훔치는 것일까. 내다 팔기도 어려울 것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그 나름의 이유는 있지 않을까. 필자는 절도범의 의중을 기준으로 유명 예술품을 훔치는 이유를 ①경제적 절도 ②정치적 절도 ③개인적 절도 ④도무지 알 수 없음, 이렇게 네 가지로 나눠 봤다.돈이 필요해서 - 경제적 이유의 절도유명한 작품은 세상에 유일무이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단순히 남의 집에서 텔레비전이나 노트북을 훔쳐다가 파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누가 언제 만든 작품이고, 지금까지 누구의 손을 거치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명한 작품이 도난당한 즉시 시장에서 유통되는 일은 흔치 않다.돈을 목적으로 훔친 것이라면 대체로 이 작품은 지하 세계를 전전한다. 그곳에서 화폐의 대용물이나 담보물로 이용되기도 하며, 국경을 넘나들며 이른바 ‘돈세탁’의 수단으로 쓰인다. 범죄자들은 훔친 작품을 다른 중개매매상이나 경매사에 판매해 불법적인 대가를 얻는다. 이를 숨기기 위해 그 돈으로 (정상적으로 유통되는) 다른 작품을 구매하고 되파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최종적으로 범죄와 무관한 듯한 자금을 만든다. 이렇게 암시장을 전전하던 작품은 시간이 흐른 후 도난당한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시 등장한다.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대부분 작품이 도난품인 줄 모르고 구매한 선의취득자가 최종적으로 소유권을 얻게 될 가능성이 있다. 그들에 의해 작품은 합법적인 예술품 시장에 안착한다. 설혹 그 작품이 오래 전 도둑맞은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더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절도범을 찾기는 어려워지고, 아예 공소시효가 만료되기도 한다.지하 시장보다 더 노골적인 방식도 있다. 예술품 소유자나 도난 보험금을 지급해야 하는 보험회사에게 작품을 돌려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는 방법, 즉 ‘예술품 납치’(art-napping)다. 절도범은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작품을 불태워버리겠다고 협박한다. 특히 절도범들은 작품이 끝내 소실됐을 때 그들이 소유자에게 지급해야 하는 거액의 보험금보다 적은 금액을 보험사에 ‘몸값’으로 요구한다. 이에 이런 방식의 범죄가 종종 성공한 사례도 있다. 메시지를 전하고자 - 정치적인 이유의 절도절도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1911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이뤄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절도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도난 사건일 것이다. 스페인의 화가 파블로 피카소도 용의자로 붙잡혀 조사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모나리자’는 2년 뒤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발견된다. 범인은 이탈리아 출신의 전직 루브르 박물관 직원인 빈센초 페루자인데(그가 작품 보호액자를 제작한 유리공이라는 얘기도 있다),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작품을 팔려다가 체포됐다.그는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예술품들을 약탈해간 것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러한 범죄를 계획했다고 주장했다. 또 ‘모나리자’를 훔친 것은 조국인 이탈리아에 이를 다시 돌려놓고자 하는 애국심의 발로였다고 강조했다. 이 사건으로 빈센초 페루자는 조국인 이탈리아에서는 영웅이 됐다. 아울러 당시 다른 르네상스 걸작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유명했던 ‘모나리자’는 이를 계기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가 됐다. 더 파괴적인 행위도 있다. 2001년 3월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탈레반의 최고지도자인 물라 오마르의 명령에 따라 세계문화유산인 ‘바미안 불상’이 파괴됐다. 탈레반은 전 세계에 테러로 인한 공포와 경악을 확산시켜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확대할 목적으로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인질로 삼았다. 그리곤 이를 보란 듯이 파괴해 세상을 경악에 빠뜨렸다. 예술품, 특히 문화재는 온전히 보존돼야 한다는 보편적인 공감대를 악용하는 수법이다.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작품을 훔친다면 정치적인 목적을 의심해 볼 만하다. 그림이 유명할수록 ‘선의취득’ 제도에서의 취득자의 선의(도품인 줄 몰랐다는 것을 의미) 요건을 갖출 가능성은 줄어드는 반면, 그 작품을 인질로 삼은 정치적 주장의 파급력은 더욱 크기 때문이다. 다만 ‘모나리자’ 절도 사건의 경우 조금은 다른 사례로 봐야할 것 같다. 당시에는 ‘모나리자’ 작품이 지금만큼 유명하지 않았다. 절도범인 빈센초 페루자가 피렌체의 한 미술관에 이 작품을 판매하려 한 것도 도난 사실이 발각되지 않을 것으로 본 것 같다. 내가 갖고 싶어서 - 사적인 동기의 절도특정 작품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신이 직접 간직하며 혼자 보기 위해 절도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소장목적 절취행위’의 유명한 예로는 클로드 모네의 ‘푸르빌 해변’ 절도 사건을 들 수 있다. 2000년 폴란드 포즈난 국립미술관은 ‘푸르빌 해변’을 도난당했고 그로부터 10년 만인 2010년 1월 작품을 되찾았다. 범인은 범행 당시 액자에서 작품을 오려내 복사본으로 바꿔 걸어 놓았다고 한다. 경찰은 범행 현장에 남겨진 지문 등을 분석해 용의자의 신원은 확인했지만, 그의 행방은 찾지 못했다. 오랜 기간 추적 끝에 붙잡힌 범인은 41세의 남성으로 모네의 작품을 경외하다가 그와 같은 범행을 저지르게 됐다고 자백했다. 훔친 작품을 팔아 경제적인 이득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이 소장하고 감상하기 위한 절도의 경우 결코 유통시장에 다시 나타나는 일이 없다. 그래서 영영 작품의 행방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절도 사건1997년 2월 22일 이탈리아 북부 도시 피아젠차의 리치 오디 미술관 내 전시실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여인의 초상’이 23년 만인 2019년 12월 발견됐다. 이 사건은 ‘등잔 밑이 어두웠던’ 경우인데, 발견된 곳이 같은 미술관 외벽 속의 작은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원사가 미술관 건물 벽을 덮은 담쟁이덩굴을 제거하다가 네모난 모양의 작은 금속 문을 발견했고, 그 안에서 검은 쓰레기봉투에 담긴 그림을 찾아냈다. 1997년 절도범들은 지붕의 채광창을 통해 갤러리에 진입하고 나중에 지붕을 통해 달아난 것으로 추정했다. 그 이후로 23년이 다 되도록 절도범이나 없어진 이 그림에 관한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은 절도범들이 시간이 흘러 수사당국이나 언론의 관심이 희미해지면 나중에 찾아가려고 바로 그 미술관에 숨겨놓았던 것 같다고 의심했다. 반면 일부에서는 단지 자신들의 절도 실력을 과시하거나 장난으로 ‘등잔 밑’에 숨겨놓은 것이 아니겠냐고 말하기도 했다.이 그림은 2020년 초 최종적으로 진품으로 판명됐고, 그로부터 얼마 후 두 명의 남자들이 자신들이 이 그림을 훔쳤다고 자백했다. 하지만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이미 지났기 때문에 앞으로 그 사건에 대한 조사가 자세히 이루어지지는 않으리라 예상되었다. 이후 우리나라에까지 후속 보도가 전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흐지부지 끝나고 만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훔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처벌은 대개 ‘절도죄’가 적용된다. 야간에 침입한 것인지, 여러 명이 합동한 것인지 등에 의해 가중처벌이 정해지는 정도이다. 증거에 의한 사실인정의 문제가 남을 뿐, 특별한 이론적인 논란은 자주 발생하지 않는 편이다. 오히려 문제의 작품을 무사히 회수할 수 있는지가 더 큰 관심거리이다. 루브르에서 도둑맞은 아름다운 보석 작품들은 다시 빛을 볼 수 있을까? 유럽에 있다는 왕실 보석 암시장과 콜렉터의 서랍 속에서 깊은 잠을 자게 될까? 되찾았다는 뉴스가 들려오길 바란다. 나도 아직 보지 못했으니까!백세희 법률사무소 아트앤 대표변호사

2025.11.1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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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전문가들이 쓴 최초의 가상자산 투자·사업 전략 지침서[새로 나온 책]

법인에게 열리는 가상자산 투자시대:기업의 투자와 사업 활용 전략’ 대검찰청 부패범죄특별수사단장,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검사 등을 지낸 김기동(사법연수원 21기) 법무법인 로백스 대표변호사와 금융감독원 감독총괄국장 등을 역임한 자본시장 감독 전문가 이창운 리앤인사이트 대표는 최근 ‘법인에게 열리는 가상자산 투자시대: 기업의 투자와 사업 활용 전략’(법률신문사 펴냄)를 출간했다.책에서는 한국 뿐 아니라 미국, 일본, UAE, EU 등 주요국의 제도를 비교 분석하고, 마이크로스트래티지·테슬라·스타벅스 등 해외 기업들의 사례를 통해 실질적 시사점을 제공한다. 또한 ▲내부 추진 전략 ▲회계·세무·공시 ▲AML·트래블룰 대응 등 실무 지침을 담았으며, 내국법인 투자와 과세, 해외 법인 활용 등 자주 묻는 질문을 Q&A 형식으로 정리했다. 부록에는 최신 판결례와 주요 용어 해설을 수록해 이해를 돕는다.김기동 대표변호사는 25년간 검사로 재직하며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 부산지검 검사장 등을 거친 금융·기업범죄 수사 전문가로, 테라·루나 등 대형 가상자산 사건의 변론을 맡고 있다. 그의 경험은 기업이 마주할 법적 리스크와 내부통제의 핵심 포인트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이창운 대표는 금융감독원에서 30년간 근무하며 자본시장조사국, 공시심사실, 감독총괄국 등을 두루 거친 자본시장 감독 전문가다. 2016년 대검찰청 부패범죄특별수사단에 파견돼 대우조선해양 분식회계 사건을 조사한 경력을 바탕으로, 법인의 가상자산 회계처리와 공시 문제를 현실적으로 풀어낸다.저자들은 머리말에서 “이 책은 가상자산이 기업 경영에 미치는 다층적 영향을 진단하고, 한국 기업이 새로운 시대의 중심에서 디지털자산을 성장 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실무 가이드”라며 “불확실한 제도 환경 속에서도 기업들이 흔들림 없이 나아갈 수 있는 길잡이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이 주의 신간AI 2026 트렌드&활용백과 10여 년 동안 정보통신(IT) 트렌드의 최전선에서 대중들과 함께 호흡해온 김덕진 IT커뮤니케이션연구소장이 오픈AI·앤트로픽·구글·xAI 등 빅테크들의 최신 전략을 분석하고, 2026년 인공지능(AI) 핫 트렌드를 소개한다. GPT-5·클로드·제미나이의 일잘러용 ‘찐’ 기능, 프롬프트 팩 사용법, 사무 특화형 AI부터 심층 리서치 에이전트, 미디어 특화 AI, 내 PC에 설치해 사용하는 오픈소스형 AI까지, 업무·학습·창작 활동에 어떻게 써먹을 수 있는지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다룬다. 블루리본서베이: 서울의 맛집 2026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맛집 평가서 '블루리본서베이'가 '서울의 맛집 2026'을 출간했다. 지난해 20주년을 맞이한 블루리본서베이는 올해도 7만명이 넘는 독자가 맛집 평가에 참여한 결과, 총 43개의 맛집이 리본 세 개를 받아 '서울 최고의 맛집'으로 선정됐다. 책에서는 ▲가겐(가이세키) ▲모수서울(컨템포러리) ▲소수헌(스시) 등 새로 서울 최고 맛집에 선정된 곳들과 함께 새로 블루리본을 받은 식당들을 소개한다. 한편 2026년 판에 수록된 전체 식당 수는 1560개로 2025년 판과 비교해 6개가 줄었다. 리본 두 개 맛집은 301개로 20곳이, 리본 한 개 맛집은 696곳에서 663곳으로 33곳이 줄었다. 달러 이후의 질서 저자는 국제통화기금(IMF) 전 수석 이코노미스트이자 각국의 경제 정책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내부자로서 자신의 경험을 서술한다. 2002년 중국에서 거리를 점령했던 900만 대의 자전거가 이후 2016년 500만 대의 자동차로 바뀐 모습을 목격하며 중국의 발전을 실감했던 사연, 한때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던 암호화폐 거래소 FTX가 파산하기 직전 설립자인 새뮤얼 뱅크먼-프리드를 만났던 썰을 풀어내는 등으로, 자칫 건조하고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 경제 이야기를 흥미롭게 전달한다. 그러면서도 세계 금융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날카로운 시선을 잃지 않아 대중서의 넓이와 학술서의 깊이를 두루 갖춘 책을 탄생시켰다.

2025.11.14 08:00

3분 소요
경북 문경서 한식·중식 스타셰프 맛대결

여행

경북 문경에서 한식과 중식 최강셰프들이 겨룬 요리대전이 열렸다. 지난 8일 문경중앙시장 어울림마당에서 전국 유명 셰프 10명이 참여한 스타셰프 미식축제가 개최됐다.이날 축제에 한식 부문에는 손승달·옥치민 한식명장과 노고은·손정희 한식대가가, 중식 부문에는 구광신·최충현·황진선·장도 중식장인이 참여해 화려한 요리실력을 선보였다.셰프들은 문경 특산물인 약돌돼지와 표고버섯을 주재료로 사용, 창의적인 요리 경연을 펼쳤다. 현장을 찾은 시민 300명으로 구성된 시식단이 투표에 참여해 우승 셰프와 최우수 메뉴를 선정했다. 선정된 메뉴는 문경중앙시장 창업점포 두 곳에서 정식 판매될 예정이다.문경시는 또한 (사)대한민국한식포럼, (사)한국중찬문화교류협회와 먹거리 개발을 위한 상생협약을 체결했다. 협약을 통해 지역 특산물을 활용한 신메뉴 개발, 로컬브랜드 이미지 제고, 지역 창업 지원 등 다양한 협력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신현국 문경시장은 "이번 상생 업무협약을 통해 문경 특산물을 활용한 새로운 먹거리를 개발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협회에 감사드린다"며, "향후 문경의 특별한 먹거리 개발을 위해 시책을 적극 발굴하겠다"고 말했다.홍성철 기자 thor0108@edaily.co.kr

2025.11.10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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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자연의 시간에서 도시의 다른 가능성을 보다[김현아의 시티라이프]

전문가 칼럼

서울은 너무 완벽하다. 거대한 시스템이 매일 같은 속도로 회전하고, 정책의 나침반도, 언론의 헤드라인도 언제나 그곳을 향한다. 모든 데이터와 인덱스, 정부의 평가 기준조차 서울을 표준(Standard)으로 삼는다. R&D 투자, 고급 일자리, GTX와 같은 거대 교통 인프라는 오직 서울의 효율을 높이는 데 집중되며, 대한민국의 모든 자원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중력이 된다.도시는 효율적으로 진화했지만, 그 속도는 인간의 숨결보다 빠르다. 거리에선 경쟁이 일상이 되고, 집은 자산이 됐으며, 시간은 통화처럼 거래된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평생 서울 중심의 도시정책과 부동산 정책을 설계하고 자문해왔다. 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드는 데 일조했던 것이다. 아니 많은 전문가들이 나와같은 일들을 해왔다. 우리가 해오던 '효율적인' 주택 공급 정책과 '빠른' 도시계획이, 결국 천정부지로 솟은 서울의 집값과 그 눈부신 성장의 그림자 뒤로 텅 비어가는 지방의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이 '완벽한 시스템'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모든 답이 서울에 있다는 그 믿음이 오히려 수도권 집중 심화, 일극화, 지방소멸을 가속시키고 있었다. 나는 다른 답을 찾기위해 요즘 지방 도시들을 직접 방문하고 있다. 자료나 통계가 아닌 도시가 어떻게 작동하고 멈추는지를 그리고 한 도시의 속도를 직접 체험해 보기 위해서다. 103개의 정자, 봉화의 시간첫번째 소개할 도시는 경북 봉화군이다. 이쯤이면 송이버섯 축제를 떠올릴 이곳 봉화에서 나는 엄청난 도시의 기록과 시간을 경험했다. 이 도시는 다른 리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도로는 한산했고,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정말 조용했다. 상가는 이른 저녁이면 문을 닫고 북적이는 인파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 나는 서울과는 다른 밀도를 느꼈다. 서울의 시간이 '거래'와 '소비', '경쟁'으로 촘촘히 채워져 있다면, 봉화의 시간은 '자연의 순환'과 '사계의 흐름'으로 채워져 있었다. 봉화의 ‘정자문화생활관’은 이 도시의 정체성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장소였다. 현지인에게 들으니 전국의 정자가 약 600여 개인데, 그 중 103개의 누정(樓亭)이 봉화에 있다고 했다. 하나의 군 단위 지역에 이 정도의 밀도라면, 단순히 유적의 숫자가 아니라 삶의 태도가 공간에 새겨진 결과다. 생활관 마당에는 다섯 채의 정자가 복원돼 있었다. ‘정자’란 단순히 풍류를 즐기던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학문이 논의되고, 풍경이 철학이 되던 자리였다. 나는 문득 서울의 공간들을 떠올렸다. 서울의 카페가 '네트워킹'과 '정보 교환'을 위한 공간이고, 고층 빌딩의 회의실이 '성과'와 '결과'를 내기 위한 공간이라면, 봉화의 정자는 아무런 목적 없이 '그냥 머무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시간은 효율로 측정되지 않고, 그저 존재함으로 완성되는 것 같았다. 문뜩 이 너른 마당에서 요가나 명상 같은 프로그램이 열린다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했다. 그건 단지 체험행사가 아니라 ‘머무름’의 가치를 다시 인식하는 일이 될 것이다.봉화가 품은 시간의 결은 단순히 자연 속에 '머무름'에만 있지 않았다. 나는 닭실마을의 충효당(忠孝堂)과 그 앞에 선 낯선 이국의 동상을 마주했다. 이 동상은 놀랍게도 베트남 리 왕조의 시조인 '리 태조(Lý Thái Tổ)'였다. 800여 년 전, 왕조의 멸망을 피해 바다를 건넌 그의 후손(화산 이씨)이 머나먼 이곳 봉화에 정착했다. 그리고 이들은 망국의 후손으로 숨어 지낸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역사가 되었다. 충효당의 기둥에서 나는 7대손 이장발(李長發) 장군이 임진왜란을 맞아 남긴 시를 보았다. 스무 살의 청년은 충주 탄금대에서 자신들의 새 조국(朝鮮)을 위해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모든 것을 효율과 개발의 논리로 덮어버리고 과거를 쉽게 지우는 서울의 시간 속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수백 년을 이어온 '기억'과 '연대', '충효'의 시간이 이 조용한 고을의 또 다른 밀도를 증명하고 있었다.'낙후'라는 편견, '느림'이라는 자산봉화의 면적은 약 1,202㎢로 서울(약 605㎢)의 두 배에 달하지만, 인구는 2만8000여명(2024년 기준) 남짓이다. 서울의 한 개 동(洞) 인구와 비슷하다. 그나마 83%가 임야이다. 효율의 기준으로는 낙후지만, 삶의 밀도로 보면 가장 인간적인 도시였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낙후', '쇠퇴', '소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그 단어들은 '서울 중심의 효율성'이라는 단 하나의 잣대로 지방을 재단하는 편견의 언어다. 봉화의 '느림(Slowness)'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서울과 같은 거대 도시가 잃어버린 가장 중요한 '자원(Resource)'이다. 봉화에 닿기 전, 영주와 안동을 거쳤다. 영주는 한때 중앙선과 영동선이 교차하며 사람과 물자가 들끓던 '철의 도시'였다. 안동은 경북 북부의 행정과 문화를 아우르던 '중심'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도시들에서 본 것은 '단절'과 '고립'의 흔적이었다. 수도권이 거미줄 같은 교통망(GTX 등)과 자본으로 서로 '연결'되며 거대한 시너지를 내는 동안, 지방은 서울로 향하는 '빨대(KTX, SRT)'만 꽂힌 채 지역 간의 수평적 연결은 쇠퇴했다. KTX가 서울-안동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동안, 이 도시들 사이를 잇던 모세혈관 같은 지역 내 연결망은 오히려 끊어지고 말았다. 이 '연결의 상실'이야말로 내가 목격한 지방 문제의 또 다른 본질이다. 나는 지방의 소멸을 애도하지 않는다. 대신 그 다른 시간을 기록하려고 한다. 이번 ‘지방의 시간을 기록한다’ 첫 번째 여정은 봉화의 '정자'에서 '머무름의 철학'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앞서 스쳐 지나간 영주와 안동의 풍경에서 보았듯, 지방의 문제는 단순히 '느림'의 찬미로 끝나지 않는다. 수도권이 거대한 '연결'의 힘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동안, 지방은 왜 '단절'되고 '고립'되었는가? 이 연결의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이어가고자 한다.(다음편에 계속)

2025.11.0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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