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동산도 리터러시(Literacy)가 필요하다]③
한국인 실물 자산 비중 75%, 고령자일수록 비중↑
금융교육·부동산 자산관리, 누구나 이용할 수 있어야

[김현아 가천대 사회정책대학원 초빙교수·정책평가연구원 연구위원·전 국회의원] 넷플릭스 드라마 ‘종이달’을 보면 은행 직원이 고령의 VIP고객의 돈을 빼돌리는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또 다른 드라마에서는 치매에 걸린 재벌회장님의 재산을 상속받으려는 자식들의 치열한 암투와 부모의 인지능력을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악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금융범죄 통계를 보면 지난해 한국의 보이스피싱 피해자 중 60대 이상 비율이 36.4%로 전체 연령대 중 가장 높았다. 피해액도 700억원을 넘어선다고 한다. 이게 드라마에서나 나오고 다른 사람에게만 발생하는 일일까? 그렇지 않다. 당장 우리 부모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멀지 않은 미래에 나에게도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고령자들이 판단력이나 대응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을 악용해 사기의 표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한국 고령자의 자산 대부분은 ‘집’에 묶여 있다. 통계청의 2024년 한국가계금융복지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가계자산 중 부동산을 포함한 실물자산의 비중은 75%에 이른다. 다른 선진국에 비해서 높은 수치이다. 그런데 노인 가구의 실물자산비중은 이보다 더 높다. 그래서 고령자일수록 자산(주택 등 부동산)은 있지만 현금이 부족(Asset rich income poor)한 경우가 많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노인층에 ‘어떻게 살고 있는 집을 유지하거나 처분할 것인가’ ‘살던 동네에서 조금 더 작은 집으로 옮길 수는 없을까’ ‘노후에 맞게 리모델링을 하면 어떨까’와 같은 질문들이 현실의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질문에 함께 고민해줄 정책이나 전문가 조언의 창구가 많지 않다.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지금 노인을 위한 금융정책, 특히 소유한 집과 노후에 삶을 의탁할 안전한 주거공간을 위한 ‘부동산 리터러시’가 절실해지고 있다.
노인을 위한 한국의 금융정책, 어디까지 왔나
한국에는 고령자 자산관리를 위한 몇 가지 제도가 마련돼 있다. 대표적인 것이 주택연금이다. 평생 살던 집을 담보로 매달 일정 금액을 연금처럼 받는 제도다. 집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어, 현금흐름에 어려움을 겪는 고령자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최근에는 고령자의 인지기능 저하에 대비한 ‘치매신탁’이나 ‘후견신탁’도 은행권에서 도입하고 있다. 평소에 미리 신탁계약을 체결해두면 본인의 판단력이 약해졌을 때도 자산이 안전하게 관리되도록 할 수 있는 장치이다.
법원에서 지정하는 성년후견제도도 있다. 판단력이 약해진 사람을 위해 후견인을 선임해 자산을 보호하고 일상생활을 지원하는 제도이다. 절차나 비용 부담으로 활성화 되고 있지는 않지만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확산하고 있다. 문제는 이 모든 제도가 제 역할을 하려면 당사자나 가족의 ‘선제적인 인식’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나는 아직 괜찮다”라는 판단이 제도를 외면하게 만들고 그 사이 사기나 손실 위험이 커지는 구조인 것이다.
미국은 이미 ‘금융 제론톨로지(Financial Gerontology)’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고령자의 금융 문제를 학문적으로 분석해 정책에 반영하고 있다. 연방정부 산하 소비자금융보호국(CFPB)은 고령자를 위한 전담 조직을 운영한다. 사기 예방 교육 자료와 금융결정 능력 자가진단 툴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금융기관들은 치매 초기 증상을 알아볼 수 있는 직원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실제로 메릴린치 같은 대형 금융회사는 노년학 전문가와 함께 재무상담사 교육을 진행한다. 고령자의 건강상태나 가족관계, 주거상황까지 고려한 조언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호주의 경우는 금융학대(Financial Abuse)라는 단어를 공공연히 사용하며, 가족에 의한 착취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대비하고 있다. 고령자 명의의 재산을 대리인이 자의적으로 처분하지 못하도록 전국단위 후견인 등록제 도입을 논의하고 있다. 금융기관에는 의심거래를 일시 정지할 수 있는 권한도 부여하고 있다.
일본 역시 초고령사회를 제일 먼저 진입한 국가로 금융기관 중심의 ‘현장 대응’과 치매 대비 신탁제도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금융청은 고령 고객 응대 시 인지기능 저하를 체크할 수 있도록 관찰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은행들은 치매 진단 전 신탁을 설정해 자산을 보호하는 ‘후견형 신탁 상품’을 출시하고 있다. 일본은 노인의 자기결정권을 중시하는 문화적 특성상, 보호자 개입보다는 본인의 사전설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고령자 대상 금융교육 보다는 금융사의 책임과 상품 설계 중심으로 제도를 정비해가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집’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고령화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고령자의 자산 보호는 이제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재정 안정성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자산이 많든 적든 노후에 자산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삶의 질과 존엄에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무엇보다 고령자들이 가진 ‘집’이라는 자산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공적 조언 시스템이 필요하다. 단순히 ▲집을 처분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은퇴 후 살기 좋은 도시는 어디인지 ▲경제적 여건에 적합한 다운사이징 ▲노인요양주택이나 장기임대주택으로의 이전 ▲리모델링을 통한 생활환경 개선 ▲자녀와의 동거 계획까지 포함된 통합적인 ‘부동산 리터러시’가 필요하다.
최근에는 재건축이나 리모델링 사업이 진행되는 아파트 단지에서 고령자들이 분담금 문제로 사업에 반대하거나 동의를 미루는 경우가 늘어난다는 기사를 자주 본다.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에 이르는 추가 분담금은 은퇴 이후 고정소득이 없는 고령자에게는 매우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이로 인해 ‘삶의 질을 높이는 주거환경 개선’이라는 취지가 오히려 노인 세대에게는 불안과 소외감으로 다가오고 있는 현실도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앞으로 이런 사업들이 제대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사업성은 물론 고령의 입주민 특성을 고려한 공공의 조정기능과 지원대책을 병행해야 할 시점이다. 은행 창구나 부동산 중개현장에서도 고령자 친화적 설명과 보호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계약서를 무조건 ‘읽고 사인’이 아니라, 충분한 설명과 숙려 기간을 보장하고 의심스러운 금융상품이나 계약 권유는 사전에 차단할 수 있어야 한다.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지금, 우리는 누구도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준비해야 할 책임이 있다. ▲고령자를 위한 맞춤형 금융교육 프로그램 마련 ▲부동산 상담 창구 개설 ▲노후자산 진단 서비스가 은행의 고액 자산가들을 위한 특별 서비스에 한정되지 않고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려면 정책과 산업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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