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도시를 살리는 또 다른 엔진, 자연의 회복력[김현아의 시티라이프]
- 기술 너머의 불안, 복원이라는 선택

[김현아 가천대 사회정책대학원 초빙교수·정책평가연구원 연구위원·전 국회의원] ‘만약 이 무더운 여름 밤, 갑작스러운 정전이 찾아온다면?’ 도시는 열을 머금은 콘크리트처럼 더위를 내뿜고 있는데 선풍기도, 냉장고도, 엘리베이터도 멈춘다. 스마트폰 불빛 하나로 의지해보려 하지만, 곧 배터리 잔량이 10%로 떨어졌다는 경고가 뜬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충전기를 꽂고, 에어컨을 켜고, 커피를 내렸을 그 모든 일상이 마비된다.
우리는 전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기술은 늘 우리 곁에 있으리라 믿었지만 그 환상이 깨지는 것도 한순간이다. 이 거대한 도시는 과연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유기체인가, 아니면 무언가에 의존하는 인공물에 불과한 것인가?
싱가포르와 두바이처럼, 인간은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기술을 선택했다. 담수화, 인공 숲, 초고효율 냉방 기술 등은 그들이 처한 기후조건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쾌적함을 유지시켜 왔다. 그러나 이 모든 시스템은 거대한 에너지 공급망과 자본, 정치적 안정이라는 토대 위에서만 작동한다.
기후위기 시대, 세계는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기술만으로 충분한가?” 그 질문 끝에 도달한 대안이 바로 ‘자연기반 해법’(Nature-Based Solutions, NBS)이다. 이 개념은 1970년대 생태학자 C.S. 홀링의 회복력(resilience) 이론과 1990년대 생태계 서비스 개념에서 비롯됐는데 2005년 유엔의 ‘새천년 생태계 평가’, 2010년대 들어서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과 유럽연합(EU),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등에서 자연을 복원하는 것이 인류 생존 전략임을 공식화했다. NBS는 단순한 환경정책이 아니라, 세계 주요 도시에서 실천되고 있는 도시를 스스로 살아있게 만드는 회복 전략이다.
도시는 어떻게 자연을 다시 불러들였나
네덜란드는 1990년대 중반, 두 차례의 대홍수를 겪은 후 새로운 결단을 내렸다. 더 높은 제방을 쌓는 대신, 강이 스스로 넘칠 공간을 주기로 한 것이다. ‘Room for the River(강을 위한 공간)’이라고 불리는 이 정책은 범람원을 복원하고, 제방을 뒤로 물리고, 일부 농지와 마을을 이전하는 대규모 계획이었다. 약 23억 유로의 예산이 들었고, 30여 개가 넘는 프로젝트가 12년에 걸쳐 추진됐다. 이 정책은 단순한 하천관리 개념을 넘어, 기후위기 시대에 도시와 국가가 “자연을 억제하는 것이 아닌, 자연과 공존하는 전환적 사고”로 접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특히 농민과 지역 주민의 반발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는 참여적 계획 절차를 통해 신뢰를 구축했고, 지역 맞춤형 설계로 프로젝트의 실효성을 높였다.
2012년 허리케인 샌디(Sandy)로 큰 피해를 입은 뉴욕은 ‘Big U’라는 거대한 방재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콘크리트 대신, 자연과 시민 공간이 결합된 방어선을 세우는 계획이다. 공원과 방조제를 결합하고, 침수 시 자동으로 닫히는 방수문을 설치하며, 도시의 해안을 ‘살아 있는 인프라’로 바꾸는 것이다. 이 두 사례는 공학적 회복력( Engineering Resilience)을 벗어나 생태적 회복력(Ecological Resilience)을 적용시킨 대표적인 사례다.
서울의 청계천 프로젝트도 이런 흐름의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복개된 하천 위의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생태를 복원하는 프로젝트에 교통 혼잡과 상권 침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시민소통과 대중교통 확충, 그리고 수질 회복 전략을 통해 도시의 한복판에 다시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복원 이후 청계천 일대에 308종의 식물과 25종의 어류, 190여 종의 곤충이 다시 정착했다고 한다.
단지 경관 개선이 아닌 도심 생태계 회복의 실질적 성과였던 것이다. 놀라운 점은, 청계천의 복원이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큰 주목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말레이시아는 쿠알라룸푸르의 ‘River of Life’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공공디자인, 하천 수질 개선, 민관협력 거버넌스를 서울 사례에서 참조했고, 중국 베이징은 도시 하천 복원 사업에서 청계천의 복개 도로 철거와 시민참여 프로세스를 벤치마킹했다. 2009년 미국 하버드대 도시디자인스쿨 세미나에서는 청계천을 “도시 회복력과 재생의 모범 케이스”로 소개하며, 뉴욕, 암스테르담 사례와 나란히 다루기도 했다. 서울시민 조차 그 효과와 의미를 잘 모르는 사이, 청계천은 도시생태 복원의 정책으로 수출이 됐고, 세계 도시들에 실질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미래를 위한 느린 선택
기술은 빠르지만 비싸고, 유지비가 든다. 자연은 느리지만, 오래 간다. 두바이는 냉방을 위해 전력의 70%를 쓴다. 담수화에 드는 막대한 에너지는 또 다른 자원 소모를 낳는다. 도시를 살리기 위한 기술도 자연생태계 회복도 모두 비용이 든다. 그러나 자연에 투자하는 도시는 우리가 사는 ‘현재’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미래’까지 준비하는 것이다. 물론 자연기반 해법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시민의 인내와 정책의 지속성이 필요하다. 빠른 성과에 익숙한 사회와 정치는 이 느린 길을 종종 외면한다. 하지만 지금의 편안함이 미래의 불편이 된다면, 그 대가는 결국 다음 세대가 치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엔진에 점화를 걸어야 할까? 기술로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는 도시, 자연의 복원력에 투자하는 느린 도시, 혹은 두 엔진을 조화롭게 가동하는 도시. 어느 길이든 우리의 선택과 결정의 몫이다.
일반적으로 정치인은 단기적 성과를 요구받는다. 유권자가 원한다면 더딘 정책, 미래세대의 부담을 줄이는 정치적 결정도 가능할 것이다. 이제 우리의 여름은 매년 더 뜨거워지고, 더 자주 잠길 것이다. 내 집만 식히는 것을 넘어 내가 살고 있는 마을과 도시, 국가와 지구를 식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다. 정책 결정의 현장에도, 시민의 일상에도 이제는 ‘미래를 향한 사유’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 자연 복원력이란 도시의 기초체력이나 면역력 일수도 있다. 기초체력이나 면역력을 갖추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일 것이다. 이제 우리가 기후온난화에 대응하기 위해 가동해야 할 엔진은 기술만이 아니다. 반백년 이상 '기술과 빠름'에 길들여지고, 더 빠른 기술발전이 예고되는 지금, 우리는 오히려 그 기술을 넘어서는 느린 선택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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